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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의 역사성을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편으로는 집단적인 정체성의 위기요, 또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적 정체성이 다시금 모색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정체성의 붕괴를 가져 온 시대, 동시에 창조적 변혁의 시대를 준비했던 그런 혼란스러운 근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민족적 정체성의 재형성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을까.

그저 민족적인 특수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만을 강조하여 현실 역사로부터 도피적인 종교 행각을 벌이는 데에 그쳤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리스도교는 민족의 특수성과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어떤 장치로 재결합시키려 했을까.

이 부분에 관해 당대 지식인이자 그리스도교인을 대변했던 윤치호와 김교신의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분석하여 하나의 유효한 실마리를 제공해준 책이 있다. 바로 양현혜 교수가 쓴 <윤치호와 김교신>(한울·1994)이 그것이다.

"윤치호를 '제국주의적인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죽음'의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으로, 김교신을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창조적인 '재생(再生)'을 대표하는 전형으로 각각 보고 양자의 사상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연구과제를 규명하려 한다."(17쪽)

이 책은 1부에서 윤치호의 정치사상과 그리스도교를, 2부에서는 김교신의 신앙과 '조선산 기독교'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윤치호는 초창기 유교적 세계관의 틀 속에 머물다가 훗날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에 유학하면서부터 서구 학문을 고스란히 흡수한 근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파 지식인이다. 1887년 4월에는 미국 남감리교의 최초 한국인 세례 교인이 될 정도로 미국의 그리스도교에 심취할 정도였다.

그런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윤치호는 귀국하여 조선 그리스도교의 자기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종교인이자 근대국가로 변혁을 지향한 운동단체 '독립협회' 회장으로 민중운동을 지도한 정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말기에 일본 정부의 귀족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적극적인 대일 협력자가 되어 1945년 해방 후에는 민족 반역자로 고발되어 자결함으로써 그의 80세 생애를 끝마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의 세계관'을 흡수하게 되었는지, 그에 대해 양현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윤치호는 서구 문명국이 비서구를 정복하는 약육 강식의 현상을 전 인류의 문명화를 위해 신이 선택한 수단이라고 보고 서구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침략을 도덕적인 투쟁이라고 보았다. 즉 이러한 인류사관에 근거하여 '서구문명=강자=도덕적인 선, 비서구 문명국=약자=도덕적인 악'이라는 독특한 등식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45쪽)

"윤치호는 미국사회에서 강자의 권력을 정당화한 일종의 강자의 권력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을 흡수해서 그의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았다. 또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정복 확대를 그리스도교의 신의 축복으로 칭송하는 '행복의 신의론'에 취해 있던 19세기 말의 '그리스도적 제국주의' 형태를 그리스도교의 원리적 본질로서 이해하고 수용했다."(54쪽)


한편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을 경험한 윤치호는 황색 인종의 문명국인 일본에 편입하여 존경과 증오의 대상인 서구를 반역하려고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의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내재화했던 윤치호는 일본을 '대리적인 마음의 조국'으로 생각했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강자 행위를 약자에 대한 교육적 의미를 지닌 도덕적 행위로 정당화 하는 것으로 그치게 된다.

그럼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동경에 유학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 사이 우찌무라 간쪼[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하여 귀국할 때까지 7년 간 성서를 배우기도 한 열렬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국내에 귀국한 그는 양정보통고등학교와 경기중학교에서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을 쏟는 한편 함석헌과 함께 잡지〈성서조선〉을 발간하여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적 입장에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주장하며 그 사상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후에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취직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꾀하였으나 1945년 4월 해방을 목전에 두고 병을 얻어 44세의 생애를 마감한 당대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신만에 의해 구원받는 존재=인간적인 자격과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신앙적인 자각을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 영역에서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교회주의는 반교회주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무한 확대와 그 내재화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생(生)=교회'를 통해서 김교신은 그리스도교를 역사 안에서 증언하려고 했던 것이다."(138쪽)

"김교신은 미국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조선 그리스도교 안에도 비그리스도교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회 관계 잡지의 발행부수와 광대한 교회의 건축, 또는 종교집회에 있어서 신자 동원수로 교회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조선 그리스도교회의 사고방식과 활동을 김교신은 특히 엄하게 비판했다."(181쪽)


그러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조선산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이론과 구호에 그쳤던 게 아니라 실천 의지를 보여 준 참된 역사 행위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자세는, 불의에서 오는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는 '자기 수고'의 자세를 통해 불의를 정화함으로써 역사의 윤리성을 회복하고 신의 윤리를 이 땅 이 역사에 구현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참된 지식인이요 당대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19세기 말, 서구 그리스도교는 그 고유의 현실 상대화 기능을 상실하고 서구 산업문명의 종교로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知)의 제국주의' 종교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윤치호는 '지의 제국주의' 숭배자로서 식민지 강자에 순응하며 '편입'하게 됐고, 김교신은 '지의 제국주의' 거부자로서 식민지 강자에 대항하며 '극복'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런 그들의 신 존재 체험과 '신의 정의와 사랑'이 그들 개인의 실존과 현실 역사 속에 어떻게 결합돼 나타났는지를 면면히 들여다 보길 원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윤치호와 김교신 - 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개정판

양현혜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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