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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용케 살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용케 살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NARA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아침부터 내도록 기다렸다. 괜히 일손이 안 잡힌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서가에 눈을 돌리자 마침 고종아우 김윤태군이 보낸 아무개 출판사에서 엮은 수필집 <조지훈>이 눈에 띄어 펼쳤다.

고종아우가 굳이 이 책을 보낸 것은 아마도 조지훈 선생이 나의 은사인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책을 펼치자 대부분 내가 알고 있거나 이미 읽은 작품들인데 그 중 '사꾸라론'이라는 글이 낯설어서 읽었다.

나는 1965년, 66년 이태 동안 지훈 선생님께 강의를 들었는데 그새 40년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책을 읽자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는 듯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인과의 대화'라고 하더니, 선생은 가셨지만 말씀은 그대로 남아서 생생히 들려주신다.

나는 선생이 들려주신 동서고금을 꿰뚫는 무궁무진한 시론이나 동서양 학문 얘기보다 파자놀이나 우스갯소리, 음담패설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 자 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 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 자 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 한글 '스' 자다."

'사꾸라론'에서는 '골로 간다'와 '얌생이 몰다'의 어원을 풀이한다. 둘 다 해방 후에 생겨난 말인데, '골로 간다'는 말은 "골짜기로 데리고 간다"라는 말의 준말로 말을 듣지 않거나 반대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처형한 후 묻어 버리겠다는 무서운 말이라고 했다.

'얌생이 몰다'는 말은 의뭉한 농사꾼이 염소를 미군 부대로 들여보낸 후, 염소 찾으러 간다면서 부대에 들어가서 염소를 찾는 척하면서 미군 부대 물건을 훔쳐 나온 게 그 유래라고 했다.

말이란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에 해방과 6·25 전쟁 그 무렵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으니 그런 말이 유행되었나 보다. 그런데 '골로 간다'는 말을 새겨 보니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지난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미국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머물렀다. 거기서 백범 선생 배후 진상을 밝히고자 현대사 자료를 열람하던 중, 2월 5일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가 당신이 NARA에서 발굴했다며 수십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들은 1950년 4월 서울 근교 좌익 사범 처형 장면과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장면, 1951년 4월 대구 부역자 처형 장면으로 모두가 군인들이 좌익 사범이나 죄수들을 골짜기로 데려가서 처형하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온몸은 전율했고 할 말을 잃었다.

맥아더 기념관
맥아더 기념관 ⓒ 박도
그리고 2월 25일 이 박사의 안내로 버지니아주 남단의 노폭(Norfolk)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 갔다. 거기서 서울 근교 좌익 사범 처형 장면 비디오와 해방 후 좌익 사범들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보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내 동족이 이민족의 입회 하에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갔던가 애통해 하며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전쟁은 연극이나 영화가 아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내보내고자 한다. 내 나라를 지키는 일도 아닌데 남의 나라 전쟁에 젊은이를 내모는 일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나는 1970년대 초, 전방에서 소총소대장(제26사단 73연대)을 하면서 많은 파월 귀국자를 소대원으로 전입 받았다. 그 무렵 화기소대 한 병사는 이따금 정신 착란을 일으키다가 끝내 탈영하고 말았는데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와서 자기가 죽인 월남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미칠 것만 같다고 했다.

그때도 그랬다. 세계 평화를 들먹거렸다. 정히 파병을 하려면 대통령 국무위원 국회의원 자제부터 먼저 보내라. 내 자식을 보낼 수 없으면 당신들이 가라.

1951. 4. 대구 근교의 부역 혐의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삽을 들고 군인들을 따라 골짜기로 가고 있다.
1951. 4. 대구 근교의 부역 혐의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삽을 들고 군인들을 따라 골짜기로 가고 있다. ⓒ NARA
농사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파고 있다
농사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파고 있다 ⓒ NARA
미 고문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병들이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
미 고문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병들이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 ⓒ NARA
부역자 농사꾼들은 체념한듯 머리를 구덩이에 박고 있다.
부역자 농사꾼들은 체념한듯 머리를 구덩이에 박고 있다. ⓒ NARA
헌병들이 구덩이 속의 부역자에게 사격하고 있다
헌병들이 구덩이 속의 부역자에게 사격하고 있다 ⓒ NARA
헌병들이 부역자들이 가져온 삽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있다
헌병들이 부역자들이 가져온 삽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있다 ⓒ NARA
1950. 4. 서울 근교 좌익사범 처형 장면, 총살한 곳에 가서 확인 사살하고 있다
1950. 4. 서울 근교 좌익사범 처형 장면, 총살한 곳에 가서 확인 사살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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