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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든 책은 헌책이다>
책 <모든 책은 헌책이다> ⓒ 그물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헌책에 무심해 왔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누렇게 변한 종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들이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헌책. 이것들은 나에게 그저 아버지의 책꽂이에나 꽂혀 있는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학창 시절 학교 근처에 존재하던 헌책방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헌책을 사는 사람들이란 고물을 수집하는 것처럼 괴상한 취미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넘쳐나는 새 책을 사볼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책벌레들이거나.

이와 같은 나의 선입견을 깬 책이 바로 <모든 책은 헌책이다>다. 이 책은 <오마이뉴스>에 헌책방 이야기를 연재하고 바르고 고운 말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최종규님의 헌책방 산책을 담고 있다.

"헌책방으로 오세요, 헌책방에서 만나요. 스스로 느껴야 좋습니다. 스스로 보고 손에 책 먼지를 잔뜩 묻혀 보아야 압니다. 헌책방에는 고운 옷차림으로 오지 마세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쌓인 책을 고개 숙여서 볼 마음가짐으로 오세요.

두어 시간 동안 먼지 구덩이에 파묻혀 옷과 얼굴과 손에 시커먼 책 먼지를 묻힐 마음가짐으로 오세요. 그러면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이 반갑고 즐거운 '내가 모르는 좋은 책'을 헌책방에 한 번 갈 적마다 한 권씩 꾸준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는 이처럼 소박하게 헌책방에 대한 안내를 시작한다. 헌책방이란 곳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동네 슈퍼마켓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의 특별한 배려 덕분이다.

책 속에는 꼼꼼히 자필로 그려 만든 헌책방 지도와 그 책방만의 특색들, 허름하지만 깊이 있는 내용이 담긴 책들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다. 심지어는 헌책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과 헌책방에 촘촘히 꽂혀 있는 책들을 빼내는 방법까지 알려 준다.

"책이란 언제나 그 책을 제대로 알아보고 읽고 살피며 나눌 수 있는 사람 손에 가야 제대로 빛을 보기 마련"이라는 그의 생각은 헌책방 임자들의 생각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헌책방의 주인들은 비싼 가게 임대료를 걱정하고 팔리지 않아 쌓여 가는 책을 한숨 속에 바라보면서도 끊임없이 책방을 운영해 나간다.

책방 주인들의 기쁨이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헌책을 넘겨주는 순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책방을 찾고 책을 구경하며 책과 가까워지는 순간 속에 존재한다. 그런 보람으로 가치 있는 책을 이곳저곳에서 수집하고 그것을 재분배하면서 책의 순환 고리 속에 중요한 매듭 역할을 하는 것이다.

헌책을 만나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촌 어느 헌책방에서 '금서 해금일에 1987. 10. 20 이근후' 라고 글귀가 쓰인 책을 만난다. 저자는 이 글귀를 보고 금서와 해금일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헌책 속에는 이전 소유자의 향기가 있으며 헌책방 주인의 따스한 손길이 스며 있다. 헌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책을 그냥 '폐기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쓸 수 있는 문화 유산'으로 여기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헌책방을 돌고 돌며 싼값으로 여러 사람들이 즐겨 읽는 책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책들이 더 많아 헌책방에 즐비하게 늘어선 책 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다.

새 것만 좋아하는 우리네 습관들이 좋은 헌책에 대한 무관심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문을 닫는 헌책방들도 많다고 한다. 책장사가 되지 않아,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 가게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들이야 다양하지만 그 내면에는 정부 차원의 정책 미비가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 정책적으로 헌책방 거리를 키우고 활발한 헌책 거래를 유도하는 방법만 마련된다면 좋은 책방들이 아쉽게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다. 헌책을 찾는 이들 또한 손쉽게 헌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서울시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살리는 대책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장사가 되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운데 우리네 책 문화를 살릴 길을 헤아리지 않아요. 그건 문화관광부도 마찬가지. 헌책방 거리는 그저 책 하나에만 얽힌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책 흐름과 책 문화와 이어진 중요한 문화 터전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구절이다. 부산의 경우 보수동 헌책방 거리를 문화 터전의 분위기로 조성하여 쉽게 헌책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책이 문화의 소산이자 문화 형성의 중요 도구임을 생각할 때 정책 전문가들은 이 점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책장을 덮으면서 문득 '헌책방에서 만나자'는 저자의 초대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헌책을 뒤적거리면서 좋은 책을 찾아보고 그 책 한 권을 위해 존재하는 많은 숨은 일꾼들의 노고를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 - 함께살기 최종규의 헌책방 나들이

최종규 글 사진, 그물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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