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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승욱
저희 아파트 단지 뒷편으로는 8차선 도로가 나 있답니다. 대구와 포항을 잇는 이 8차선 도로와 저희 아파트 단지 사이로 '완충녹지'(기자주- 행정기관에선 이런 곳을 완충녹지라고 부른 답니다)도 길게 뻗어 있습니다. 물론 완충녹지 란게 우리 동네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완충녹지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답니다.

저희 아파트 단지 뒷편으로 텃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답니다.
저희 아파트 단지 뒷편으로 텃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답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지난해 여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잡초만 무성해 있던 이 완충녹지에 구청에서 제법 굵은 밑둥의 은행나무와 히말라야시다 등 가로수들을 '옹기종기' 심으면서 '녹지다운'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동네 주민들이 새벽 공기를 맡으며 운동할 곳이 변변치 않았고, 출·퇴근을 위해 지하철역을 이용하려면 이 완충녹지를 이용해야 했던터라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주는 몇 그루 나무로 다듬어지는 녹지의 변화는 그만큼 '즐거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답니다. 공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움직임의 주인공은 '동네텃밭'을 키우는 동네 할머니과 할아버지들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곳엔 밭고랑이 생겨난 겁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고추 묘종이 심어지고 상추가 조그만 이파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겁니다. 평소 딱딱한 아스팔트만 딛고 다니던 도시 사람들에겐 유독 더 눈에 띄는 변화였습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을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동네텃밭 가꾸기에 나선 것입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러나 잡초만 무성했던 땅이 '농사짓기'(?)에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는 변변치 못한 결과로 그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동네텃밭을 가꾸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노력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올해 봄부터 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묘종 수에 비례해 맺혀있는 고추의 영근 정도도 작년과는 달랐답니다.

고추뿐만 아니었습니다. 1~2센티미터 자라다 노랗게 바랬던 상추도 쌈 싸먹기 좋을 정도의 적당한 크기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종류도 고추나 상추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파에다 참깨, 고구마에서 감자까지 가지 수도 많아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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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이곳에서 영근 고추며 상추를 만날 때마다 언젠간 꼭 시간을 내고 자세히 들여다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결국 저는 지난 6일 새벽 잠자리를 추스렸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부시시한 얼굴로 '동네텃밭'으로 발을 들여 놨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한 할머니가 고추 모종에 정성스레 물을 주고 계셨습니다.

집에서 직접 플라스틱 물통에 담아 가져온 물을 조심스럽게 붓고 계시던 이 할머니는 갑작스런 카메라의 출연에 적지않게 놀라신 것 같았습다.

"젊은이가 일찍 나왔네. 우리 같은 늙은이야 뭐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이렇게라도 소일하는 거지. 좀 자라면 집에 가져가서 손자도 먹이고...근데 아직 한번도 못 먹었어. 아직 멀었제. 비가 적어서 잘 자라지도 못하는 것 같애."

이 할머니는 남들이 심지 않은 조그만 귀퉁이 땅에 얼마전 2000원짜리 고추 모종 20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고추 모종에 정성스레 물을 주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습니다.

가지런히 심어놓은 고추 모종에서 고추가 먹기 좋게 자랐습니다.
가지런히 심어놓은 고추 모종에서 고추가 먹기 좋게 자랐습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하지만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의 '욕심'이 영근 야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침마다 운동삼아 이곳에서 만나는 또래 친구과 나누는 인사도 재미가 '솔솔' 하답니다.

"뭐 할라고 사진은 찍어(웃음)... 얼마나 됐냐고... 난 얼마 안돼. 그냥 경로당 가는 것보다 요렇게 한번씩 나와서 내 고추는 얼마나 자랐나 보기도 하고... 그 재미제. 또 여기 나와 있으면 잠 없는 동네 늙은이들도 만나서 '밤새 잘 잤나' 인사도 하고 그러제."

동네 할머니들이 산책을 겸해 텃밭으로 나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야채들을 보고 계십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산책을 겸해 텃밭으로 나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야채들을 보고 계십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마침 저만치서 할머니를 바라보는 '친구'들이 인사를 청해옵니다.

"잘 잤어"-"일찍 나왔네"-"오늘은 좀 자랐나 우째됐노"...안부 인사가 이어집니다.

자기 땅도 아닌데 자기 땅인냥 밭을 가꾸는 모양새에 동네사람들은 인상 찌푸리지 않을까요. 하지만 밭을 가꾸지 않는 어르신들도 저처럼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시더군요.

등산 모자를 눌러쓴채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하시는 한 할아버지는 '일석이조'라고 하십니다.

"좋은 일이제. 여기 그냥 버려두면 뭣해. 그냥 놔두면 잡초나 무성해지고 그러면 모기다 파리다, 벌레만 들끓제. 나라에서도 돈 써가면서 여기 잡초 없애려고 일 해야잖아. 그런데 어른들이 소일도 하면서 잡초도 없애고, 주민들도 벌레 없어 좋고. 일석이조 아니야."

허리를 구부린채 종종 걸음을 걸으며 산책하시던 80대의 한 할머니는 자신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걱정이 앞섭니다. "아침에 운동하면서 지켜보면 좋제. 옛날 촌에서 농사 지을 때 생각도 나고...근데 잘 자라지도 못하고 죽는 거 보면 내 맴이 아프다 아이가. 오늘은 비가 좀 오려나."

ⓒ 오마이뉴스 이승욱
주변 반응이 좋다하더라도 이곳에서 밭을 가꾸는 어르신들은 마음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동사무소에서나 구청에서 이곳의 '소식'을 듣고 '어름장'을 놓을 때면 더욱 그렇답니다.

군에 간 손자가 휴가 나오면 손수 키운 야채를 먹이겠다며 밭을 가꾼다는 김영순(가명·74) 할머니. 김 할머니는 얼마전부터 구청에서 찾아와 밭을 없애라고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년부터 땅에 박힌 돌도 손으로 다 빼내고, 밭고랑도 만들고, 잡초도 없애고 일도 많이 했다 아이가. 근데 이거 없애라고 하면 우야노. 걱정이 되제. 엎어라 하면 나라가 하는 일이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섭섭하제. 옛날 남의 땅부치다 밭 뺏길 때보다 더 맴이 아플끼라."

바로 어제 심어놓은 감자를 캐서 며느리에게 갔다줬다는 김 할머니는 '어머님은 어디서 이렇게 맛있는 감자를 가지고 오셨나'며 반겼다고 자랑입니다. 김 할머니는 호미로 잡초를 뽑아내시며 바쁜 손놀림을 보입니다.

군에 간 손자가 휴가 나오며 먹이려고 밭을 가꾼다는 김영순(가명·74) 할머니가 자신이 가꾸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고 계십니다.
군에 간 손자가 휴가 나오며 먹이려고 밭을 가꾼다는 김영순(가명·74) 할머니가 자신이 가꾸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고 계십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김영순 할머니가 밭에서 가꾼 감자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날 캐고 남은 감자라 크기는 작지만 감자다운 모양을 갖췄습니다.
김영순 할머니가 밭에서 가꾼 감자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날 캐고 남은 감자라 크기는 작지만 감자다운 모양을 갖췄습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이런 땅 버려놓으면 뭐 하노. 우리 같은 늙은이들 할 일도 만들어주고, 지나다니는 사람 불편한 것도 없고, 가로수 죽는다 하는데 이렇게 해주면 나무한테도 더 좋은 거 아이가. 젊은 사람들 고추 묘종이 뭔지도 모르고 입으로만 먹을 줄 알지 근본도 모르잖아. 이렇게 심어놓으면 지나다니는 도시사람들 구경도 하고 좋잖아."

좀더 오래동안 동네 어르신들의 희망이 이곳에서 자라는 고추처럼 영글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산뜻하게 만나던 우리 동네텃밭에 저의 희망도 심어놓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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