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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앞에 제수를 차렸다.
묘비앞에 제수를 차렸다. ⓒ 김재경
잘 정돈되어 말끔한 잔디, 질서정연한 비석 사이로 까치 한 쌍이 사뿐히 내려 않으며 오빠 내외의 영혼인 것처럼 우리 가족을 먼저 반긴다.

소담스런 국화 바구니를 묘비 앞에 놓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펼치며 향을 피웠다. 오빠와 남동생… 서열 순으로 절을 했다. "나도 절해야지" 현충일의 의미나 보훈 가족의 아픔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조카들까지 덩달아 큰절을 한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 생전에는 현충일이면 으레 10시 정각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묵념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잡하지 않은 날을 택해 연례행사처럼 현충원에 모여 함께 참배하고 있다.

현충일이면 지금은 고인이 된 내 어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야! 너 있는 곳 어디란 말이냐. 금쪽같은 내 새끼 보고 싶어 못 살겠네. 니가 어쩌다가 여기에 있단 말이냐. 에미가 너 보고 싶어 왔다. 제발, 대답 좀 해봐라"하고 묘비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다가 쓰러지셨다.

묘비를 붙잡고 오열한 사람이 어찌 내 어머니뿐이랴! 통곡하는 내 어머니의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사방이 또 다른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로 이어지던 것이 70년대 현충일의 모습이었으리라.

제사가 끝나자 우리 가족은 따가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음복을 한 뒤 전사 당시의 오빠를 회상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사라진 현충원 참배는 왠지 허전했다. 자꾸만 오빠의 묘비 앞에 어머니가 오열하고 계실 것만 같다.

낮에는 산업전선, 밤에는 야학에서 삶이 고달플 때면 사과 한 알 달랑 묘비 앞에 놓고 눈물짓던 소녀이던 내 자화상이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다. 슬그머니 가족 틈에서 벗어나 묘비로 향했다.

30년 전 "오빠, 나 너무 힘들어요. 나는 어떡하라고요"하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하소연하던 소녀가 당시, 어머니 또래의 중년이 되어 묘비 앞에 섰다. "오빠! 이제는 동생들도 모두 성장했으니 모든 시름 거두시고 편히 쉬세요"하고 묘비를 어루만져 본다.

그 당시 오빠는 부모님께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고 우리 가족의 기둥이자 희망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지역의 동량이었기에 우리가족뿐만 아니라 면장님도 오빠의 전사를 안타까워 하셨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전사통지서를 받고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의무병이던 오빠는 워낙 성실했기에 상사의 파견근무에 착출되어 동행했다고 한다.

전사하던 날 새벽 이북에서 기습적인 포격이 시작되었다. 잠귀가 유난히 밝은 오빠는 그 급박한 순간에도 동료들을 깨워서 대피시키고, 자신은 군용트럭 밑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그러나 군용트럭에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었기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전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빠는 숨을 거두며 물 한 모금 간절히 호소했지만 부대 동료인 김 병장님은 살려볼 생각으로 그토록 원하던 물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갈 줄 알았더라면 물이라도 줄 것을…."

주검을 보고 통곡하던 김 병장님은 수년 동안 국립묘지를 찾았다고 한다. 아들의 시신을 상처하나 없이 가져다가 앞산에 묻겠다던 어머니를 설득한 면장님의 권유로 오빠는 여기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오빠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을 보며 "봄이면 새싹이 돋아나고 잎이 피건만, 내 새끼는 어디가서 움도 싹도 없단 말이냐"하며 평생을 통곡과 한숨으로 사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 놈이 원수여. 원수가 환생하여 우리한테 원수갚고 간겨"하고 어머니를 위로하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 그러면 "당신은 애비가 되어, 어찌 그리도 인정머리가 없단 말이오"하는 어머니의 질타가 이어졌다.

내 어린 시절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언제나 잔뜩 흐린 날씨처럼 칙칙하고 어두웠다. 어머니는 아궁이 불을 지펴 아침밥을 짓다가도 오빠의 영혼이 부른다며 집을 나가서 점쟁이 찾아 방황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글쎄 가장골(산비탈 밭) 담배밭고랑에 있는데 통곡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재경이 아버지가 어찌나 슬프게 통곡하던지…."

내 아버지는 체면 때문에 참았던 오열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산골짜기에서 쏟았던 것이리라. 그 후 저녁 무렵 아버지는 급하게 요강을 찾으셨다. 요강 가득히 핏덩이를 토하시며 쓰러지셨다. 설상가상으로 화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가난 속의 6남매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의 짐이 되었다.

전사 후 받은 연금을 자식의 몸값이라며 한 푼도 못 쓰시던 부모님은 끝내 그 돈을 모조리 사기 당하는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간 오빠의 영혼 결혼식을 서둘렀다. 그래서일까. 늘 한 마리가 맴돌던 묘역에는 까치 한 쌍이 다정히 묘비를 맴돌고 있다. 영혼 결혼식 후 우리 가족은 현충원 참배 때마다 오빠 부부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묘비 사이로 간간히 참배객들이 보인다.
묘비 사이로 간간히 참배객들이 보인다. ⓒ 김재경
여기에 묻힌 묘비마다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 사방을 둘러본다. 뒤편 '육군 일병 이문재의 묘'앞에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부부가 조촐한 음식을 차려놓고 앉아 있다. 오빠의 묘역에서 눈물을 훔치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음식을 권한다. 보훈 가족이란 동질감으로 아픈 사연을 나누게 되었다.

수원에서 왔다는 이길재씨는 "고등학교 때 군대간 형을 잃었지요. 95세 된 노모가 지난 해는 이곳을 찾았지만 지금은 연로해서 못 오시지요. 형제인 우리보다도 부모·부인·자녀의 한이 더 크죠"하며 다른 유족의 아픔을 돌아보는 여유를 보였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내려오며 자신의 뜻을 펼칠 틈도 없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수없이 빌었다. 아이들과 함께 잘 가꾸어진 43만평 녹지를 휴식 공간 삼아 종종 참배할 것을 새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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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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