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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교수
김삼웅 교수 ⓒ 오마이뉴스 김태형
"비뚤어진 역사의 긴 그림자인가. 민족반역 친일파의 후손들은 재산 찾기에 혈안이고,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이제 겨우 국적 찾기에 나설 수 있을 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 운동에 나선 김삼웅(전 대한매일 주필) 성균관대 겸임교수의 탄식이다.

김 교수는 28일 오후 2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주최로 열린 2004년 춘계 단재학술회의에 참석해 "특별법 제정을 통한 단재 선생의 국적회복"과 "남북 공동 '단재전집' 출간"을 강력히 촉구·제안했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1인자이자 근대 민족사관을 정립한 항일 언론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중국 여순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국적과 호적이 모두 상실된 상태다.

단재 선생이 무국적자가 된 배경

김삼웅 교수가 이날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단재가 무국적자가 된 연원은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강점 직후인 1912년 '조선민사령'을 제정하여 조선인의 호적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단재는 그 이전인 1910년 중국 청도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국 망명했기 때문에 호적상 무국적인이 되었다.

그 후 단재는 1917년 질녀의 혼사문제로 잠시 본국에 잠입한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다시 망명하여 1936년 2월 중국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단재의 유골은 충북 청주 남성면 향리로 귀향하게 되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허가에 난항을 겪게 된다. 면장직을 맡고 있던 종친 덕에 '공개적인 암장'이 이뤄지지만, 면장은 이로 인해 파면조치를 받았다.

이후 단재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취적이 불가능해 각종 불이익과 불편을 감수해오다 1986년께야 비로소 호적을 신청, 취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재는 여전히 국적이 회복되지 못한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다.

김삼웅 교수는 "단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대접을 보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일말의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남아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라고 지적하며, 17대 국회 개원 직후 특별법을 마련해 단재 선생의 국적회복에 즉각 나설 것을 촉구했다.

평양 인민학습당에 단재 유고 상당수 보존

이어 김 교수는 단재의 유고(遺稿) 상당수가 평양 인민학습당에 보존돼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남북 공동으로 '단재 전집'을 출간할 것을 공식 제안했다.

김병민 중국 옌벤대학 총장에 따르면 단재가 대만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후 그의 유고는 톈진에 있는 모 인사가 보관하였고, 해방 후 북한에 넘어가 60년대 초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되어 지금 평양 인민학습당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삼웅 교수는 "<조선사통론> <고구려사> 등 단재의 대표적 역사서 외에도 기행문·소설 등을 망라한 방대한 사료가 남북 공동으로 출간된다면 민족문화 창달과 남북 동질성 회복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단재를 알면 동북공정 이겨낸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
최광식 고려대 교수 ⓒ 오마이뉴스 김태형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는 최광식 고려대 교수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각각 단재의 한국사 인식과 고구려사 연구 의의를 밝히는 주제 발표를 담당했다.

특히 단재가 베이징 망명시대에 손수 만든 잡지인 <천고(天鼓)>를 다룬 최광식 교수는 "단재가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지역으로 비정함으로써 중국과 고조선이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실증했다"며 단재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처하는 적합한 방법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1921년부터 한문체로 발행된 <천고>는 7호까지 발간되었는데, 김삼웅 교수와 최광식 교수는 <천고>를 발굴하여 국내에 소개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장인 김원웅 의원은 인사말을 통해 "이미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 초안을 마련중에 있다"며 "친일파가 주도하는 대한민국에도 민족정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켜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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