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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풍동 철거현장. 자동차 한 대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불에 타 가라앉아 있다. 지난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과 철거민들의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풍동 철거현장. 자동차 한 대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불에 타 가라앉아 있다. 지난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과 철거민들의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무너진 집터 사이로 폭격을 맞은 듯 불에 탄 자동차들이 방치돼 있었다. 주인 잃은 개 한 마리가 온 몸에 검은 재를 뒤집어쓴 채 건물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간밤 '전투'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은 채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이라크 팔루자? 아니다. 이미 50년도 전에 포화가 멈춘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근교의 한 철거지역 풍경이다.

고양시 일산구 풍동 369-16번지. 비가 내리는 9일 낮 기자가 찾아간 이곳은 마치 미군과 게릴라들의 전투가 한창인 이라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주택공사가 택지개발을 위해 완전히 밀어버린 허허벌판 곳곳에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터지지 않은 화염병과 깨진 유리병, 찢어진 옷가지와 유리구슬 등으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나마 성한 건물의 벽은 불에 그을려 시커먼 몰골이다.

벌판 한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4층 건물이 있다. 원래는 3층 빌라였으나, 누군가가 컨테이너 박스를 세워 올리면서 4층 건물로 높아졌다. 이른바 '골리앗'이라 불리는, 철거민들 최후의 보루다.

골리앗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원확인을 거쳐야만 했다. 기자가 철거민들을 만나기 위해 접근하자, 마치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처럼 검은 스키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옥상에 나타나 기자에게 '멈추라'고 경고했다. 신원을 확인하고 잠시 기다린 후에야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철거민들 '가수용단지' 등 요구 2년째 '장기 농성'

철거민들이 세운 4층 높이의 '골리앗' 맨 위 망루에서 24시간 규찰을 서고 있다.
철거민들이 세운 4층 높이의 '골리앗' 맨 위 망루에서 24시간 규찰을 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산 풍동 철거민들이 주택공사를 상대로 농성에 들어간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지난 2002년 주택공사가 풍동 인근 26만여 평의 부지에 7700여 세대의 주택을 조성할 계획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하자, 이곳 주민들은 '철거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최소한의 주거권을 요구하며 주택공사에 맞섰다.

당시 주택공사가 철거민들에게 내세운 조건은 두 가지. 4인 가구 기준으로 약 7백만원 가량의 보상을 받든지, 보증금 3000만원(25평 기준)에 월세를 따로 내는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든지 하나를 택하라는 것.

그러나 대부분 어렵게 생계를 잇는 세입자인 철거민들은 이 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700만원의 보상금으로는 터무니없이 오른 집값 때문에 전셋집도 구할 수 없을뿐더러 3000만원 이상 드는 보증금은 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거민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임대아파트를 지어줄 것과 공사기간 중 가수용단지를 조성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주택공사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풍동 주민들은 주택공사를 상대로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2년 3월초 철거민대책위를 구성한 이래 철거용역반을 앞세운 주택공사의 무력 행사는 점점 심해졌고 철거민들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11세대의 철거민들은 작년 10월, 그나마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는 철거지역 한 빌라로 쫓겨 들어갔다. 현재 이들은 단단하게 용접한 철문을 굳게 잠그고, 컨테이너 박스로 망루를 세워 '장기 항전'을 벌이는 중이다.

화염병 던지고 유리구슬 쏴... 한밤에는 '인질극'까지

철거용역반원들이 새총으로 쏜 유리구슬. 얼굴에 맞을 경우 치명적인 무기다. 오른쪽은 최루가스를 채운 사제 최루탄.
철거용역반원들이 새총으로 쏜 유리구슬. 얼굴에 맞을 경우 치명적인 무기다. 오른쪽은 최루가스를 채운 사제 최루탄. ⓒ 오마이뉴스 김영균
좁은 계단이 이어진 골리앗 내부는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주택공사가 이곳의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린 것은 지난 달 28일. 이 때문에 계단 곳곳에는 굵은 양초가 간신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먹는 물과 생필품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구할 수 없는 상황.

골리앗 안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자'들이었다. 지난해 10월 철거민들이 이 곳에 모여 저항을 시작한 뒤, 용역철거반을 앞세운 주택공사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지난 8일 새벽만 해도 5∼6m에 이르는 철제빔을 장착한 포클레인을 앞세운 몇 시간 동안의 공격이 있었다. 철거용역반들은 골리앗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새총으로 단단한 유리구슬을 쏘아댔다. 유리병에 최루가스를 채운 '사제 최루탄'도 등장했다. 하나 하나가 치명적인 '살상무기'인 셈이다.

이날 밤 용역반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철거민들은 거의 모두 부상을 입었다. 한 여성주민은 얼굴 두 곳에 유리구슬을 맞아 실명위기까지 갔다. 어두운 밤과 새벽, 용역반원들이 날리는 유리구슬이 보이지 않아 미처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남성 주민은 바로 발 밑에 화염병이 떨어져 턱과 팔,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들은 갇혀 있는 상황이라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 기막힌 일은 용역반원들이 '인질극'까지 벌이며 철거민들을 몰아내려 했다는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 8일 밤, 용역반원들은 골리앗 내부에서 저항하고 있는 한 노인의 아들을 붙잡아 철거민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했다. 채병남(46) 철거민대책위원장은 "그 아들이 폭행을 당하며 '어머니, 살려주세요'하고 우는데, 그런 기막힌 장면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며 "용역반원들이 자행하는 폭행은 이라크인들을 학대하는 미군보다 더 심한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거민들은 또 이 같은 폭력이 난무하는데도 경찰이 손을 놓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채 위원장은 "법치국가에서 경찰의 묵인 아래 인질을 두드려 패고, 끌고 다니고, 애걸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이냐"고 분개했다.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이 골리앗을 향해 유리구슬 새총을 당기고 있다.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이 골리앗을 향해 유리구슬 새총을 당기고 있다. ⓒ 풍동 철거대책위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이 화염병으로 추정되는 병들을 박스에 담아 나르고 있는 모습.
8일 새벽 용역철거반원들이 화염병으로 추정되는 병들을 박스에 담아 나르고 있는 모습. ⓒ 풍동 철거대책위

6개월째 싸우며 부상당한 이들도 문제지만, 철거민들에게 더 큰 아픔은 밖에 나가 있는 가족들이었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철거민들의 자녀들은 현재 부모와 떨어져 친구집이나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다. 철거민대책위의 한 회원은 "아이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현재 이들은 언제 다시 철거용역반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24시간 돌아가며 규찰을 서고 있다. 규찰대원들에게 헬멧과 두터운 스키마스크는 기본 장비다. 언제든지 화염병과 유리구슬이 날아들어 머리와 얼굴을 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용역반원들 "더 이상 묻지 마라"... 폭력 막아야 할 경찰은 어디에?

골리앗을 나서는 길, 철거민들과 대치하고 있는 철거용역반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골리앗 내부의 동정을 이리저리 살피던 이들은 낯선 사람을 발견하자 "이리 나오라"고 손짓했다. 무너진 건물 뒤에 몸을 숨겨가며 손짓하던 그들을 향해 골리앗에서 돌멩이 하나가 날아갔다.

대부분 20∼30대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용역반원들은 골리앗 인근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 놓고 동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들은 폭행이나 새총, 화염병 사용에 대해서 강하게 부인했다.

오히려 이들은 "철거민들이 접근만 하면 대형 새총으로 골프공을 쏘고, 염산을 뿌린다"고 주장했다. 한 젊은이는 "소방호수까지 동원해 불을 끄느라 소방관 시험을 봐도 될 판"이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폭행사건과 인질극, 사제 최루탄 사용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예닐곱명의 용역반원 중 책임자격인 한 젊은이는 "우리가 책임자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기자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다 안다, 너희들(용역반원들)도 그만 말하고, 기자양반도 더 이상 묻지 마라"며 말을 막았다. 그의 한마디에 일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골리앗 쪽으로 가지 말라"는 용역반원들의 경고를 받고 건설현장본부를 따라 나오는 길에는 이미 아파트의 기초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골리앗 주변 지역은 여전히 폐허로 남은 채 긴장과 폭력 사태가 이어지는 중이다. 지역주민 2명이 철거현장을 통과하려다가 용역반원의 경고를 받고 돌아갔을 뿐, 폭력을 막아야 할 경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탄 승합차 앞에 주인 잃은 개 한마리가 온 몸에 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지난 8일 새벽 격렬했던 폭력사태를 보여주는 대목.
불에 탄 승합차 앞에 주인 잃은 개 한마리가 온 몸에 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지난 8일 새벽 격렬했던 폭력사태를 보여주는 대목. ⓒ 오마이뉴스 김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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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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