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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구묘역)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15주기 추모제'에서 어머니 황정자씨가 영정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6일 오후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구묘역)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15주기 추모제'에서 어머니 황정자씨가 영정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 오마이뉴스 안현주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표적인 의문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이철규 열사 15주기 추도식'이 6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구묘역)에서 열렸다.

이철규씨의 어머니 황정자(70)씨는 지난해 "내년에는 어떻게 죽었는지나 알고 '제사' 지낼 수 있것제"라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활동에 기대를 했지만 이날 추도식 역시 그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추도식을 올려야만 했다.

이철규씨의 추도식은 그의 시신이 발견된 날(89.5.10)과 행방이 묘연한 날(89.5.3) 등을 고려해 5월 6일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매년 5월 6일 열린다. 이날 추도식은 이철규 열사의 선후배, 유가협 회원,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임원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철규열사 추모사업회(이하 추모사업회)' 문병란 회장은 추도사에서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돼 명예회복이 되어서 그동안의 한은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다"면서도 "늘 이 자리에 서면 부끄럽고 탄식만하는 우리가 한심스럽기도 하다. 열사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회장은 "이철규는 미국이 자신들의 안보목적을 위해 이 땅을 희생시켜왔다는 진실을 남보다 먼저 외쳤다는 이유로 죽게됐다"면서 "현재 15년 전처럼 미국은 평화의 시대라고 떠들면서 약소국를 대상으로 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언젠가는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질 것"

김정길 광주전남민중연대상임대표는 "우리는 아직 (이철규 열사를) 어떻게 고문했는지,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면서 "그 죄인들을 찾기위해서 거대한 힘과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철규씨의 아버지 이정진(74)씨는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제사를 지내고 싶었는데…"라며 "더 조사를 하면 될 것도 같은데…"라고 한 숨을 쉬었다.

이어 이씨는 "그래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명예회복을 할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위안은 된다"면서 "진상조사 하는데 여러가지로 어려운 부분은 법을 고쳐서 해야한다. 언젠가는 밝혀지리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법이 개정돼야 한다"며 유난히 기대를 많이 했던 황정자씨는 "평일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짧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편 '추모사업회 진상규명대책위원회' 박열(조선대 교수) 위원장은 활동보고에 나서 "매년 진상조사 보고를 하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불능 판결을 했고, 현재 2기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오는 6월 30일로 활동이 끝난다. 이철규 열사를 검거하기 위해 4수원지 근처에 경찰 외 다른 기관원들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검거했다'는 진술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박 위원장은 "검거 여부와 타살 여부에 접급하는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권한에 한계가 있고 당시 관련자들이 이제는 최고위층에 속해 있어 조사가 미진할 수밖에 없다"며 "한 달 남은 조사기간을 연장해 3기 조사를 해야하고 조사권한을 강화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사기간 연장·조사권 강화하는 법 개정있어야"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이 열사의 묘소에 헌화 한 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이 열사의 묘소에 헌화 한 후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이철규씨의 의문사와 관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002년 '조사불능' 처리한 바 있으며 2기 조사활동을 통해 행방이 묘연했던 89년 5월 3일 당시 이철규 열사가 광주호 4수원지에서 공안기관원들에게 검거가 되었는지 여부에 대해 집중 조사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철규 열사를 검거했다는 결정적 근거 정황이나 진술이 없어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 한 관계자는 "직접적인 사인과 관련해서는 진척이 없다"면서 "그러나 2기 조사활동에서 당시 이철규 열사를 검거하려 했던 이유, 수사하려 했던 목적 등에 대해서는 확인한 사실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조사권 미약인데 자료제출 거부, 조사 거부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서 "이 사건과 관련 공안기관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으나 일부만을 받아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89년 5월 3일 당시 이철규 열사를 검거하기 위해 광주북부경찰서 소속 경찰 5명 외에 다른 기관의 요원들이 4수원지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또 '공안기관이 이철규 열사를 검거했을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한 관련진술과 정황은 있으나 결정적인 제보나 진술은 없는 상태다.

한편 이철규씨는 지난 4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및 보상대상자로 결정됐다.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변정수 변호사)는 4일 제105차 심의위원회를 열고 "89년 당시 조선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철규씨 등 40건에 대해 명예회복 대상자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이철규씨는 지난 1989년 조선대학교 <민주조선> 교지편집위원회 편집장 시절 교지 <민주조선>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 '미제침략사' 등을 게재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9년 5월 3일 행방이 묘연해졌고, 5월 10일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인을 '익사'로 단정 발표하고 검찰은 사체부검 결과를 토대로 '실족 익사한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이에 대해 학생들과 사회단체 인사들을 중심으로 '애국학생 고 이철규고문살인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가 발족해, 178일간의 사인 진상규명 투쟁을 벌였으나 타살 의혹을 밝히지 못했고, 이씨의 시신은 89년 11월 4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이 열사를 추모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이 열사를 추모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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