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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섭 기자님의 '문법과 독해는 죄가 없습니다'라는 기사 잘 읽었습니다. 기자님의 주장대로 문법과 독해는 무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우리 나라 현행 입시 제도 하에서는 유죄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직접 겪은 정말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지요. 대학 재학당시 영문학과 과목인 영어회화를 수강한 경험이 있습니다. 학원 가서 비싼 돈을 들이느니 학점도 따고 영어도 좀 배워보겠다는 심산이었지요.

강사는 미국인이었는데, 영문학과 강사인지라 일반 학원에서 고용하는 수준의 원어민이 아니라 '영어'를 제대로 전공한 분이었습니다.

이 강사와의 회화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서울 유수 대학의 학생들(그것도 대부분 영문학과)이지만 대화 수준은 전 기자님이 지적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강사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거나, 주어와 술어의 인칭이 맞지 않는 엉터리 영어를 연발했으니까요.

당연히 강사는 "What do you mean?"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이 한참 손짓 발짓을 하며 부연 설명을 해야 겨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곤 했습니다.

자, 여기서 문법과 독해 중심의 영어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드러나는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나름대로 영어 공부에 열성이었던 한 학생은 교수가 질문을 하면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 그러니까 한국의 중학교는 미국의 고등학교와 국민학교의…. So, Korea middle school is between American…. 고등학교가 뭐죠? 그래, high school and elementary school…."

즉, 항상 우리말로 이야기한 다음에 그걸 영어로 번역합니다. 물론 이 번역은 국문을 직역한 것으로 외국인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영어 회화에서 이런 유형의 영어를 구사하는 분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어를 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말하기 훈련과 영어 작문 훈련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익숙한 직독 직해를 거꾸로 하는 것이 영작, 회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 영어 실력이 늘지 않는데, 우리 교육은 이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더욱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례입니다.

하루는 회화를 하다 말고 이 강사가 답답했던지 나름대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자, 여러분은 그래도 한국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잘 했던 분들이라니까, 내가 영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걸 하나 가르쳐 드리지요. 사실 이건 미국에서도 영어 문법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것이긴 한데…."

이렇게 말하며 강사가 칠판에 적은 게 무엇일까요? 바로 문장의 5형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강사가 3형식을 적기도 전에 모두 웃으며 S+V+O를 먼저 이야기했고, 이에 강사는 크게 놀랐습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에 중학교 때부터 배운다고 했더니 입을 다물지 못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강사는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의 말하기나 쓰기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한데, 이런 고급 문법을 왜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영어 교육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법 그리고 독해는 영어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일단 영어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입에서 나오기 전에 우선 문장 형식부터 배우고, 영어 문장을 한글로 옮기는 것부터 배우는 현행 교육제도 하에서는 문법과 독해는 분명히 영어 실력을 저해하는 주범일 뿐입니다.

전 기자님의 말처럼 문법을 '제대로' 배운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배우는 영어문법책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맞는 것'보다 '틀린 것'을 강조하고, 일반적인 문법보다 예외적인 것을 강조하고, 언어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틀렸다고 가르칩니다. 당연히 학생들의 언어적 상상력은 극도로 제약될 수밖에요.

그렇게 책을 만들고, 그런 책들이 20년 넘게 팔리는 이유는 하나는 우리 입시제도와 학교 시험이 그런 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가 존속하는 한 전 기자님이 한탄하는 엉터리 영어 만점자들은 속출할 것이고, 문법과 독해는 유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 영어 과목을 시험에서 제외시킨다면 '최소한 학생들의 말하기 실력은 지금보다는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 봅니다. 비단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질식시키고 획일적인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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