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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을 '몽니'라 한다. 내가 어머니 말씀을 거스르며 마음속에 단단한 몽우리 같은 심술을 가득 채워 성질을 부렸던 때는 미운 일곱 살을 한해 남겨둔 여섯 살 무렵이다. 적당히 하다 그쳤으면 그만인 것을 고집불통이 되어 사사건건 떼를 쓰고 풀어지지 않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삔치'라 불리며 귀염을 독차지하다가 어느 때부턴가는 매를 벌기도 했다. 꿍해서 그 맛나던 밥상을 물리고 1인 시위를 벌이던 일이 잦아졌다. 아마도 세상 돌아가는 걸 조금이라도 알면서 남들과 비교할 줄 알게 되면서 그렇게 자꾸만 비뚤어져만 갔을 것이다. 집안 형편은 아랑곳 않고서.

어떤 일이든 시키지도 않는데도 척척 알아서 했던 아이가 먹을거리, 옷가지, 잠자리, 집안일, 심부름 때문에 투정을 하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억척스럽게 졸라대니 어른들과 형제자매들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너, 다리 밑에서 주서왔어 이놈아" 하신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토록 나를 괄시한 거야.' '내가 왜 이 집에서 그렇게 순진하게 살았을까. 인제 정말 참말로 엄니를 찾아 효도해야지.'

울지도 않았다. 그동안의 모든 의문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형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과 나는 닮은 데가 거의 없다. 바로 위형은 언제나 나를 따돌리기까지 했다. 어른들도 나에겐 늘 형이라는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나 물려주며 맞지도 않은 옷만 입으라고 하셨다. 게다가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귀엣말을 나누며 히히덕거리지 않던가. 내 흉을 보았던 게 틀림없다.

거기에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이놈 새꺄 아래 다리꺼리에 가봐. 거기 가면 니 엄니 있을 것이여. 맛난 것도 많이 줄 것인께 가서 배터지게 먹고 잘 살어. 난 인자 니 엄니 아니다. 알았제? 좋은 옷도 많이 사준단다."

인사를 한번 하고는 곧장 집을 뛰쳐나왔다. 진짜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머무를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미적거리는 건 서로 별 도움이 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불을 지른다.

"잘 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치는 동안 내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진짜 엄마를 만나면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을 테고 오냐오냐하며 내가 원하는 걸 새 것으로 다 바꿔줄 것이니 마땅히 챙길 것도 없기도 하거니와 짐만 늘어날 뿐이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 다시는 이런 후질구레한 집에서 살지 않아도 돼.' '진짜 엄마는 날 알아보려나.' '울 엄마는 정말 이쁠까?' '엄마는 그동안 나를 다른 집에 맡겨 두고 얼마나 보고자왔을까?'

모자(母子) 상봉 장면을 어찌 극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럼 난 광주(光州)로 가서 멋지게 살 수 있는 거야.' '중앙여객(금호고속의 전신) 타고 나갈까, 자가용 타고 갈까?' 벌써부터 나는 갖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외톨이 처지도 잊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면 어떤가. 진짜 엄마를 찾는다는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냇물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세 개 있는 교각 중 밖에서도 잘 보이는 가운데 받침 아래에 가서 풀쩍 깔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동구 밖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 오늘 오실 수도 있지 않은가. 인연이 그렇듯 잠깐 동안의 실수로 서로 지나치는 수가 있다. 난 그 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내 엄마는 여기다 날 버리고 갔다고 했다. 엄마는 소식을 듣고 있을 것이므로 언제고 내가 집을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달려오실 거야. 서울에서도 맘만 먹으면 엄마는 천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오실 분이지 않은가.

농사일로 바쁜 봄철이라 소달구지에 풋나무를 베어 잔뜩 싣고 오는 내외가 지나간다. 깔 망태기에 취나물을 잔뜩 뜯어 구부정하게 동네로 들어오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그 뒤로 아는 분들만 들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꼽아 기다리는 어머니는 영 보이질 않는다.

'어? 정말 안 오시려나. 이러면 안 되는데. 그 때는 나를 기르기 힘들어서 떠나갔다지만 오늘 찾으러 오지 않으면 큰일인데. 그래도 반드시 오실 거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하염없이 기다렸다.

해가 서산에 걸려 발갛게 물들어간다. '이러다가 오늘 못 만나면 나는 어딜 가야 하나?' '그러다 정말 고아가 되는가 보다.' 싶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지.

그때였다. 멀리서 풍기(風氣)로 고생하다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보리이삭, 벼이삭을 주워 연명하는 옆 마을 천두 아줌마가 떨리는 오른손을 뒤춤에 단단히 묶고 한 손을 거칠게 저으며 다리를 삐딱거리며 신을 지질 끌어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불쌍했다. "천두야 천두야!"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놀려댔고 엎어뜨리기까지 했다. 네 마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제사, 혼인을 거르지 않고 정확히 날짜를 기억했다가 밥 얻어먹고 사는 분이었다. 뿐인가. 대개 사람들은 재수 없다며 욕을 버럭 내지르고 쫓아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우리 집엔 그래도 가짜 어머니의 인심과 그 분의 남편이 '우리 먹는 것처럼만 나눠 먹으면 된다'며 반겼기에 자기 집 드나들 듯 했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우리집에 그리 수도 없이 드나들었으니 혹시나 언제고 나를 데려가려고 온 건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생각이 몰려왔다.

'설마? 저분은 아닐 거야.' 부자라고 했지 않았던가. '어찌 저런 분이 엄마일까. 우리 엄마는 천사일거야.'

순간 나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괜스레 저런 분이 와서 "아들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얼른 집에 가자. 얼른" 하면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니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뒷동산으로 내빼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다행히 긴 시간이 맑은 시냇물처럼 흐르고 천두 아주머니는 내 앞을 지나 제삿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휴-"

시간은 자꾸 흘렀다.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오금이 저려왔다. 7시를 넘긴 시각이라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게 어두워져오고 있었다.

갑자기 설움이 몰려왔다. '울 엄니는 내가 쫓겨난 사실도 모르고 있는 걸까?' '그 때 나를 다리 밑에다 버렸던 분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엄마아 엉엉엉" 눈물이 자르르 흘러내렸다. 쫀득쫀득 엉겨있던 코가 이내 녹아내렸다.

"훌쩍훌쩍"

콧물을 닦기도 귀찮아 흐르는 누런 콧물을 쭉쭉 빨아먹고 혀로 핥았다. 다리거리는 마을 맨 앞쪽이다. 번쩍 불빛이 보였다. 어제는 누군가가 마당바위 근처에서 도깨비를 보았다고 했다.

'분명 아랫다리라고 했는데?' 두 개 다리 중에서 아래니 학교 가는 다리가 맞다. 그런데 왜 오시지 않는 걸까. 진짜 엄마는 이리도 야속하단 말인가.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각이 네 시간 가까이 흘렀으니 광주에서 출발하였어도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어떻게 할까? 가짜 엄마한테 하루만 재워달라고 할까. 안돼! 사내자식이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그 집으로 기어들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그 동안 먹여 살려줬으니 하루쯤이야….' '김규환! 너 왜 자꾸 약해지는 거야? 그러면 안 된다니까. 차라리 동무 집에 가서 자라.'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을엔 불빛마저 사라졌다. 하늘에만 반짝이는 별빛으로 유난하다. 은하수는 곧 쏟아질 기세다.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아.' 하고 있었다.

누나: "규환아 얼른 집에 가자."
나: "싫어! 싫단 말야. 울 집에 갈 테여."
누나: "그만 허고 가자. 엄마가 너 꼭 데리고 오래."
나: "울 엄니는 여기 없어. 내일 올 거야."

작년까지 나를 업어 키운 누나가 내일 아침에 쓸 물 기르러 오면서 나를 데려가려고 온 것이다. 한번 삐친 나는 누나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누나: "얼른 가자. 니 엄마는 안 와. 긍께 누나랑 집에 가서 살자."
나: "싫어 혼자서 가."
누나: "밥 다 묵어부렀겠다."

오랜 실랑이 끝에 모른 척하고 따라 나섰다. 집 앞에 이르러 사립문 앞에서 멈춰 섰다. 오래 서성이다 이 집 아저씨께 괜한 노여움을 살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불 안 때고 어딜 끼대 온 것이여. 어여 밥 묵어라."
나: "예."

밥을 남기면 다음날 밥 먹을 자격이 박탈이 되던 엄한 집안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톨도 남기지 않고 대충 밀어 넣었다.

저녁을 먹고 가짜 엄마 옆을 떠나 이부자리에 발만 조금 밀어 넣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집 신세를 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새벽에라도 진짜 엄마가 부르면 튀어나갈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니 바지도 벗지 않았다.

'그래 내일이면 난 엄마 찾으러 갈 것이여. 오늘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 눈칫밥 먹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날 다리에서 주워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간 길러주신 두 분과 이 집 형제들에게도 감사한다. 나중에 한번 성공해서 찾아뵈면 될 일이다.'

어찌나 마음을 상하고 속으로 울었던지 금세 꿈나라로 가고 말았다. 다음날 차일봉 밑으로 다랭이 논 갈러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막걸리를 들고 가는 통에 그 일은 잠시 잊었다.

하지만 그날의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중학교 갈 때까지 진짜 엄마를 찾아 헤맸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 다리가 무언지도 모르고. 산파(産婆) 할머니가 훤히 알고 있는 그 다리의 뜻을 알아차린 지 2년도 안되어 진짜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갔다. 여자를 알게 되던 사춘기 막내아들을 남겨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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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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