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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아들 녀석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린이 성서 시리즈물, 안네 드 그라프의 < Darkness Before The Dawn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하고 많은 책 중에 이 책이 내 손 그물에 걸린 건 아마도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불씨, 양심의 흔적일 수도 있는 나의 신심 때문일 것이다.

2000년 전 이 시간 언저리에, 예수는 발기발기 자신의 육체를 찟기며 그들 앞에 섰다. 어찌 육체뿐이겠는가. 그의 영혼 또한 고통의 지뢰밭임을 성서를 통해 익히 들어 온 터.

여지껏 나는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고난 주일'(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기리며 예배드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매년 들어 왔다. 기독교인이라면, 그것도 성인이 된 후 성도(聖徒)라는 직함을 받았다면, 고난 주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가늠하고도 남을 것이다.

내 나이보다 어린 33세의 남자, 예수. 그의 죽음이 다른 어떤 때보다 더 실감이 나는 요즘이다. 아마도 전쟁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통해 6살난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죽음을 목도했다. 아, 인간들… 저 무지막지한 인간 군상이여!

예수는 사람들의 탐욕과 오해로 고통을 받았다.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저 가녀린 슬픔의 얼굴, 고통으로 무너져 버리기 직전의 모습을 어린이책에서 느끼다니….

예수는 지구인들을 위해 그의 전 생애를 '사랑'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잔인한 인간들은 대못을 살에 박고, 온통 가시로 둘러진 왕관을 만들어 죽는 이를 더욱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금의 우리들은 아닌지.

그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쓰여진 죄목은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크나큰 국가적 범죄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왕은 누구인가? 그들의 메시아는 누구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였다.

내 자신에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그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마리아와 같았을까'라고. 내 답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로 다소간 단정적이다. 왜냐하면 힘 없고 배운 것 없는 '마리아들'에게는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들의 남루한 삶에는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실재하는 '존재'가 더욱 살가웠을 테니까.

물론 당시 수구세력이자 지배 계급에게 그 하잘것없는 인간들을 위한 존재(예수)는 그들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금의 보이지 않는 신에서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지금과 같기만 하기를 몹시 바랐으니 말이다.

결국, 예수는 눈에 보였다는 이유로,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좌절만 안겨준 채 어처구니없게 죽었다. 그러나 곧 대반전이 이루어졌다. 예수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것.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은 정말이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만약 부활이 없었다 해도 나는 그를 메시아로, 신으로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살아 생전에 해 온 일들은 신만이 가능한 일이 많았지만, 만약 그 모든 것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그의 삶은 역사의 인물로서 충분히 '모범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범은 결코 치졸한 인간의 '의지'로는 이룰 수 없기에, 죽음 직전의 그를 상상하는 일은 괴롭고도 슬프지만 기꺼이 그 괴로움에 빠져 들고 싶다. 예수의 고난, 그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어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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