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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역

▲ 추암역의 선로
ⓒ 이종원

덜컹거리는 비둘기호 열차에 몸을 맡기고 차창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예쁜 역이 나를 유혹하면 미련 없이 내릴 결심을 한다. 기차 여행은 이렇게 예쁜 꿈이 있고 아련한 추억이 함께 한다. 과거를 연결하는 녹슨 철로를 하늘하늘 거닐다 보면 어느덧 뽀얀 연기 속에 희미하게 숨겨져 있는 추억을 만나기 때문이다.

동해에는 그렇게 상상했던 예쁜 역이 몇 군데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정동진역도 참 아늑했는데 지금은 인파 때문에 여간해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변했다. 망상역 역시 내게는 아련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지금은 새마을호도 정차할 수 있도록 큼직한 역사를 만든다며 한창 공사중이다.

그래도 내 추억에서 변치 않는 역은 역시 추암역이다. 이 곳엔 그 흔한 역사도 없다. 기차는 자갈밭에 사람만 달랑 내려주고 훌쩍 떠나갈 뿐이다. 횡하니 가버리는 열차의 뒷꽁무니를 보면서 참 야속하게 생각했었다.

몇 년만에 추암역을 다시 찾았다. 난간에 팔을 드리우며 가장 편안 자세를 잡고 추암의 해변을 바라보았다. 변함없는 쪽빛 바다다.

추암해수욕장

▲ 추암해변
ⓒ 이종원

'조금전 역에서 바라본 바다가 없어지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자 조바심을 가지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해변의 남쪽 끄트머리에 섰다. 거기서 바라본 추암 해변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동해는 주로 해안이 일직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활처럼 휘어진 해수욕장을 만나기 쉽지 않다. 추암의 해변은 휘어졌다.

▲ 갈매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 이종원

비릿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해변은 조용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비워졌고 어느새 정결함이 채워진다. 갈매기도 나는 것을 잊은 채 해변의 주인인양 이러 저리 노닐고 있다. 수첩을 꺼내 들었다. 무엇인가 느낌을 적어내고 싶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방금 내 눈으로 소박한 바다 풍경을 보았지만 그 감동에 짓눌린 손가락은 아무 것도 표현해 낼 수 없었다. '쓰긴 뭘 써…. 그냥 즐기면 그만이지.'

나도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싶다

친구에게 지금 추암이라고 전화했더니

"<겨울연가>의 준상과 유진이 처음으로 멋지게 걸었던 바다고, 마지막으로 유진을 떠나 보내면서 눈물을 쏟아 냈던 바다야."

라고 한다.

나도 왠지 영화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군대 시절 <배달의 기수>란 반공 영화에서 양민을 괴롭히는 인민군 엑스트라 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내가 나온 장면은 가위질당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영화 말고 사랑과 애증이 함께 하는 근사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오늘 나는 홀로 감독도 되어 보고 주인공도 되면서 해변을 거닐었다. 그러나 봄볕에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갈매기에게 나는 그들을 괴롭히는 영화배우가 되어 있었다. 평화를 즐기는 해변의 갈매기는 나를 보고 놀라 소스라치며 "끼륵끼륵"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구친다. 고요함을 깬 나를 용서해다오.

▲ 추암의 바다
ⓒ 이종원

해수욕장 왼편에 삐쭉 솟아난 바위들이 보였다. 그것을 향해 마냥 걸었다. 예쁘게 생긴 나무다리도 나왔다. 사뿐사뿐 건너갔다. 바위산을 오르다가 바다를 보려고 등을 돌렸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카메라에 담아본다.

촛대바위

▲ 촛대바위
ⓒ 이종원

오솔길을 조금 오르니 이윽고 촛대바위가 나타난다. 큼직한 파도가 바위를 때려도 바위는 꿈쩍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무지막지한 파도가 이렇게 오묘한 바위를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애국가에 흐르는 비장한 분위기가 바다에도 느껴진다. 실은 아침 해가 살짝 걸쳐진 촛대바위를 봐야 추암의 진면목을 본다지만 게으른 탐승객은 이 정도 풍경도 호사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남한산성에서 정동방은 이곳 추암입니다"라는 안내돌이 세워져 있다. 남한산성은 청나라에 쫓겨 인조가 몽진하고 항전했던 곳이 아닌가? 비록 왕은 삼전도의 치욕을 보였지만 남한산성 동쪽 끝자락에는 이렇게 우뚝 선 바위가 항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항복했어도 우리 국토는 한치의 양보를 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 전망대에서 바라본 추암의 바다
ⓒ 이종원

조금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하얀 벽에는 시시콜콜하고 사연이 가득 담긴 낙서가 보인다. 꼭 이렇게 글로 남겨야만 사랑이 확인되는 것일까?

▲ 포말이 눈밭 같다.
ⓒ 이종원

촛대바위에서 해암정쪽으로 내려가면 기암괴석이 길게 이어졌다. 하얀 포말이 바위를 덮치고 마치 눈밭에 바위가 솟아난 듯한 장면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요묘한 조화다. 수천년 동안 풍파를 견디어 낸 산고의 현장인지도 모른다.

조선 세조때 한명회가 강원도 제찰사로 있으면서 이런 추암의 경승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는 것 같고 또는 호랑이가 꿇어 앉는 것 같기도 하고, 용이 꿈틀거리는 같이 천태만상을 이루었으며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 강릉 경포대와 통천 총석정과 그 경치가 난형난제이며 기이한 점은 이곳이 더 좋다."

한명회가 이렇게 말하면서 이름을 '추암'에서 '능파대'로 고치겠다고 말할 정도로 비경이다.

해암정

▲ 해암정
ⓒ 이종원

동산을 내려오면 바다를 병풍 삼아 앉아 있는 해암정이 우릴 환하게 반긴다. 말이 정자지 사대부집 가옥과 비슷하다. 뒷문을 활짝 제끼면 철조망이 눈에 거슬렸지만 아까 보았던 늠름한 괴석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바다와 바위를 뒷정원으로 삼은 셈이다. 시인 묵객들은 이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시심을 돋구었을 것이다. 그걸 말해주듯 안쪽 벽에는 이 곳을 다녀갔던 문인들의 글귀가 가득하다. 우암 송시열이 함흥으로 귀양살이하러 갔다가 이 곳에 들러 남긴 글도 보인다.

▲ 추암해변에 말리고 있는 오징어
ⓒ 이종원

해풍으로 말리는 동해 오징어가 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나는 지금 떠나가네. 자네가 지금부터 추암을 지키게나.'

동해항과 북평공단

▲ 한때 북적했던 동해항 터미널
ⓒ 이종원

추암 해변을 나오면 북방 교역의 중심지인 북평공단이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창원 같이 큰 공단을 조성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서거로 공단은 축소되고 말았다. 그나마 화력발전소등 몇몇 회사를 빼고 나면 공단은 거의 비어져 있는 상태다. 공단이 조성된 지 8년이 지났건만 분양률이 겨우 34%밖에 되지 않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보다 못한 농민들이 그 곳에 채소를 심어 놓았다. 연기가 가득해야 할 공단이 주말 농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쓸모 없는 땅이 된 이유가 뭘까? 동해 항구는 컨테이너를 선적할 수 없고 과다한 물류 비용 때문에 대형 항구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컨테이너를 하역할 수 있도록 항구를 만들어 주면 되지 않을까? 더구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4시간이면 서울로 연결되기 때문에 물류 비용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몇 년 전 동해 사람에게는 실날같은 희망이 있었다. 동해항이 금강산 유람선의 출발지가 된 것이다. 수많은 금강산 관광객을 태우고 동해항을 떠나는 유람선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남북 민간 교류의 출발지라는 동해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전국의 수많은 관광객은 동해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근처 횟집거리나 숙박업소는 연일 손님으로 들끓었고 관광용품이 날개 놓친 듯 팔렸던 때도 있었다.

추암해변 여행정보

1)자가차량
경부- 영동- 동해 고속도로 이용 (268.6km, 3:20 소요)
동해 I.C-7번국도-삼척방향-효가4거리-4.8km 직진-추암 해수욕장

2)대중교통 이용시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과 동서울 터미널- 동해까지 운행-동해시(시내버스)- 추암해수욕장.

3)주변관광지
북평장터(3일, 8일), 무릉계곡, 삼화사, 묵호항
그러나 경제 논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해상 관광을 찾는 관광객은 자꾸만 줄어들고 유람선을 유지할 유가는 늘어만 가니. 결국 속초항에 금강선 유람선 출항의 자리를 내주더니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진 것이다.

지금 지역 경제는 다시 한번 쓴맛을 보고 있다. 한때 북적거렸던 동해항 터미널은 텅 비워져 쓸쓸하게 서 있고, 거대한 유람선이 있었던 부두엔 낡아빠진 러시아 대게잡이 배만 외롭게 서있다.

한때 북방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던 동해시는 이제 새로운 기지개를 펴고 있다. 북한-러시아-중국-일본을 잇는 환동해의 물류 중심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금년 10월이면 동해고속도로의 확장 공사도 마무리된다. 이렇게 동해시는 물류 거점 도시와 청정 도시로 탈바꿈할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

힘찬 기상을 서린 촛대바위처럼 동해시도 다시 한번 힘찬 도약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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