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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부터 TV 없는 삶을 사는 황경희씨.
지난 2000년부터 TV 없는 삶을 사는 황경희씨. ⓒ 권윤영
TV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처음 세상에 등장하던 시절부터 사람들과 TV는 불가분의 관계가 돼버렸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TV를 갖춘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부러워하며 TV를 보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마치 부의 상징이라도 되듯 보다 큰 화면을 원한다. TV 속 화면에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까지도 종속시켜 버리는 것이다.

어느 집이나 TV가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세상. 하지만 황경희(43)씨의 세상은 여느 사람들의 세상과는 다르다.

"저희 집에는 TV가 없답니다. 4년 전에 이사를 오면서 TV를 버렸어요."

'엥?'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지는 말이다. 요즘 시대에 TV가 없다니 무슨 사연일지 사뭇 궁금하다.

고물장수에게 줘버린 TV

TV 없는 거실.
TV 없는 거실. ⓒ 권윤영
황경희씨는 지난 2000년 10월 대전 근교로 이사를 갔다. 집 주위로 개울이 흐르고 야산과 논이 펼쳐져 있는 20여 가구가 규모의 작은 동네다. 지역으로는 대전이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마을의 풍경이다.

도심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던 그녀의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오기까지는 복합적인 사정이 많았다. 미국생활을 오래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가족 모두가 지쳐 있었다.

"단독주택에 살다가 아파트에 오니 공간의 답답함이 더했습니다. 복도식 아파트라 여름에는 문도 열지 못했을 뿐더러 상가 앞은 늘 시끄럽고, 밤이면 화려한 네온사인 때문에 불을 켜고 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가족들 모두 스트레스로 지쳐가고 있었죠."

그즈음 그녀는 아침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한번도 놓치지 않고 매회 시청했을 정도로 드라마에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런 후 깨달았다. 불륜 등 비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눈을 잡아두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실상을 말이다. 쇼 프로를 보더라도 한번 웃고 나면 그만인 일회성 소모일 뿐이었고, 시간을 많이 뺏을 뿐만 아니라 유익함보다는 유해한 게 더 많았다.

지친 도시생활의 대안으로 대전 근교로의 이사를 준비하며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TV를 없애기로 하고 고물장수에게 줘버린 것. 솔직히 아까운 기분도 들었지만 집에 두면 언젠가는 또다시 보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이던 아들딸과 남편도 찬성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껏 TV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TV 없애자 좋아진 가족관계

TV 없애자 자연스레 대화가 늘었다.
TV 없애자 자연스레 대화가 늘었다. ⓒ 권윤영
"처음에는 불편한 것도 있었어요. 밖에서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의 반 정도가 드라마, 쇼프로, 연예인을 화제 삼아 하는 이야기거든요. 아이들도 처음에는 학교에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죠."

하지만 지금은 불편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TV가 없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거나 사회적으로 뒤떨어짐을 느끼지도 않는다. TV를 대신해 잡지나 신문을 구독하고 인터넷이나 라디오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족의 관계가 더 좋아졌다. 자연스레 대화할 시간이 많아지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온 가족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자주 보곤 하는데, 영화를 본 후에는 자연스럽게 토론의 장이 만들어진다. 그로 인해 아이들의 사고력 폭이 넓어졌을 뿐더러 끝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대화를 이끌어 간다.

독서 같은 취미생활이나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역시 장점이다. 그녀는 플루트, 남편은 기타, 아들은 드럼과 피아노, 딸은 클라리넷을 함께 연주하곤 한다.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사안이 많아졌고 아이들도 긍정적이고 밝아졌다.

전원생활을 즐기다

TV가 없다는 것 외에 전원생활 역시 주변사람들에게 있어 화제의 대상이다.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 ⓒ 권윤영
"그럼 애들 학원은 어째?"
"그런 마을에 살면 무섭지 않느냐?"

그녀가 그곳으로 이사 간 후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다. 대부분 도시로 아이들을 학교 보내려고 하지만 그녀는 거꾸로다. 전교생이 130여명뿐인 조그만 동네 중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2학년인 아이들에게 사교육비는 전혀 투자하지 않는다. 그 비용 대신 음악회, 공연 등 문화적인 경험과 여행을 권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무섭지 않느냐고 자주 묻는데 처음에는 밤만 되면 불빛 하나 없고 깜깜한 동네가 무섭기도 했어요. 지금은 이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은 깜깜한데서 잠을 자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개를 기를 수 있다는 것도 전원 생활의 장점.
개를 기를 수 있다는 것도 전원 생활의 장점. ⓒ 권윤영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있으면 항상 TV를 틀어놓고, 그 앞에 모여 밥을 먹는다. 독립공간이 아닌 거실이라는 공동의 생활공간에서도 자연스레 대화가 줄어든다. 모두들 TV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보면 "참 대단하다"라는 말뿐이지 실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TV를 없애는 것만 대안은 아니에요. 시청 시간을 조절하거나 필요한 프로그램을 골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TV를 거실에 놓지 말고 방에다 들여놓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답니다. TV가 방에 있으면 부모들이 쉬거나 자고 있는데, 자녀들이 들어와 TV를 보는 일이 줄어들지 않겠어요. 가족 모두가 TV 앞에 모이는 일이나 늦은 시간까지 TV 보는 일도 자연스레 줄어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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