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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일이 있을 때마다 꼬부랑 할아버지들이 다 나와서 두어 시간 일하고는 하루 어울려 논다.
동네 일이 있을 때마다 꼬부랑 할아버지들이 다 나와서 두어 시간 일하고는 하루 어울려 논다. ⓒ 전희식
시골에 가서 오래 살려면 동네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는 나 역시 귀농하려는 분들에게 그 얘기부터 한다. 시골은 도시와 달라 이웃과 어우러져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겉돌면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말 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 동네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인 것 같다. 아침저녁 보는 대로 인사만 부지런히 해도 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네 노인분들 차도 태워드리고 힘든 쌀가마니도 들어다 드리는 노력봉사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생활방식을 그 동네 사람들과 똑같이 바꾸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는 말도 맞는 것 같고 저렇게 하는 말도 듣다보면 맞는 것 같으니, 정해진 정답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우리 동네 살면서 겪는 10년 곡절을 봐도 꼭 그렇다.

귀농하여 그 동네사람 되기까지

요즘은 독불장군으로 행패를 부리며 사는 사람도 종종 보게 된다. 시골마을에도 농사에 목을 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있다. 시골인심도 옛날 같지 않다고 말을 하는데 시골마을 살아가는 모습이 어디까지 바뀔지는 사실 아무도 장담 할 수 없는 것 같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다 모였다. 보름날 한 번 동네사람끼리 놀자고 이장에게 말했더니 이장이 그러마고 하더니 정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럼, 동네사람들이 다 모이지 그게 뭐 대수라서 그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 동네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작년 여름 동네 농수로 보수작업 하는 날도 이번처럼 돼지를 한 마리 잡아 종일 잔치를 벌였는데 동네사람 중 윗동네 사람들은 안 왔다. 할아버지들은 왔지만 할머니들은 단 한분도 안 왔다.

시골동네 사람들이 이웃끼리 맺고 풀고 하면서 살아가는 방식들이 알 만하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다가도 이날 보름날처럼 아래 윗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을 보면 외로 꼬였던 고개가 풀리기도 한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동네여론

우리 동네 마을회관을 지은 지가 3년짼데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였다. 근데 이번처럼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군내에 사람은 줄어드는데 마을회관은 계속 늘어난다. 동네에 빈 집이 수두룩하고 집집마다 단촐하게 노인 부부만 사는 경우도 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있는 판에 늘어나는 것이 마을회관이다.

이상한 것은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는 데도 간판은 죄다 ‘노인회관’으로 달려있다. 한번은 아는 사람에게 물어 봤더니 마을회관은 동네 주민이 일정 가구 수가 되어야 지을 수 있는데 우리 동네처럼 겨우 스무 가구쯤 되면 마을회관을 지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노인회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단체장들의 표 모으기 선심으로 마을회관이 손바닥만한 동네마다 들어선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거야 그렇다 치고, 마을회관을 다 지었는데도 이상하게 윗동네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오지 않았다.

맨날 보면 아랫동네 할머니들만 수제비도 만들어 먹고 마늘도 까고 티브이도 보고 하는 것이었다. 윗동네 분들이 왜 안 오냐고 물어봐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이 없고 쉬쉬 하는 분위기였다.

씨족 중심으로 뭉치는 시골정서

내력은 이랬다.
몇 년 전에 우리 동네 뒷산에다 전주시내에 사는 부잣집이 가족 묘지를 써는데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다. 장묘 관련법에도 동네에서 300미터 이내에는 마을주민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농가에서 채 1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묘를 쓰니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잣집이 동네에 씨족을 이루고 있는 임씨네랑 같은 종씨라 종중에선 찬성을 했던 것이다. 슬금슬금 한두 사람씩 묘지 반대대열에서 빠지더니 동네 다수를 차지하는 그 성씨가 빠져버렸다. 이때부터 그 성씨들과 아닌 사람들이 서로 갈라섰다.

나중에는 타성바지 동네주민 집 뒤에 묘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임씨 주민들이 꿈쩍도 않고 방관하였다. 점점 서로 골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이 타성바지 주민이 한 분이 시내로 직장을 다니는 버릇 못된 젊은네와 땅 분쟁이 생겨 죽이네 살리네 하는 갈등이 오래 계속되고 노인네가 수모를 당하는데도 동네 임씨네서는 못 본 척 했다. 그러다보니 마을회관에 타성바지 사람들이 와 있으면 임씨 성 주민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을회관 앞 가마솥에는 동네에서 잡은 통돼지 한 마리가 들어가 있다.
마을회관 앞 가마솥에는 동네에서 잡은 통돼지 한 마리가 들어가 있다. ⓒ 전희식
올해 정월 대보름 날 마을 행사는 별 게 아니었다. 동네 돈이 좀 쌓인 게 있어 노래방 기계를 들였는데 개통식을 겸한다고 노인네들이 한 자락씩 노래솜씨를 뽐내는 날이었다. 이렇게 하여 몇 년 쌓인 감정타래를 풀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끼리 묵은 감정을 풀고 화해를 해서 무엇보다도 내가 한 시름 놓게 되었다. 작년에 몇 차례나 우리 집으로 견학 겸 농사 체험을 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을회관을 빌려 며칠 이용하려고 해도 이장은 물론 어느 쪽도 서로 눈치만 살피고 책 잡히지 않으려고 가타부타 허락을 않는 것이었다. 올해는 별 문제 없이 잘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런 예는 많다.
사소하게 서로 감정이 상하면 으르렁대다가도 면민 체육대회나 농협 조합원 총회 같은 날 다른 동네사람들이랑 무슨 시합이라도 벌어지면 자연스레 동네 단합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 감정을 눅이고 화해한다.

작년에 우리 면 면민 체육대회가 면내 무슨 연수원 운동장에서 열렸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금배지 달고 와서 곰처럼 운동장을 그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어슬렁대고 까만 양복 입은 수행원들이 굽신굽신 허리를 굽실대던 그날.

쌍둥이네 할아버지가 답숙 취해 가지고 앙숙으로 지내는 아랫동네 할아버지랑 어깨동무를 하고 이 마을 천막 저 마을 천막을 순회하며 행사 참견도 하고 음식 타박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분 할아버지는 밭가에 심은 감나무 그늘이 자기네 밭작물을 못 자라게 하네, 어쩌네 하는 문제로 다투고는 한동안 말도 안하는 것을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터라 서로 수군대며 취한 두 할아버지의 화해를 반겼다.

시골살이에 있는 단합과 화해의 장치들

농사철이 되면 또 묵은 감정들을 턴다. 지금이 그런 때다. 겨우내 이 골목 저 골목 마실 다니면서 남 얘기 자기 얘기, 나중에는 누가 먼저 한 얘긴지도 모를 정도로 돌고 도는 얘기들을 주고받다가 농사철이 시작되면 훌훌 털어낸다. 마음속에 담아두고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물도 나누어 대야 하고 종자도 주고받아야 하는데 쓸데없이 냉기만 풍기다가는 결국은 서로가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시골에는 화해를 부추기는(?) 장치나 계기들이 참 많다.

한번은 5년 전인가 동네로 시내에서 젊은 부부가 이사왔다. 마을 뒤편에 아담하게 슬라브 양옥집을 새로 지어 왔다. 마침 그 즈음 동회를 하는데 노인네들이 이구동성으로 성금을 받아내자고 했다. 우리가 동네 길 닦고 버스종점 포장하느라 땅도 내 놓고 했는데 그 젊은네가 집 짓는다고 대형 트럭이랑 레미콘 차가 드나들면서 길이 다 망가졌다는 것도 그럴 듯한 구실이었다.

200만원으로 하자느니 300만원 하자느니 액수까지 거론되었는데 나는 반대를 했다. 한 5년 살다보니 목소리를 높여도 될 처지가 되어 있는 내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래 가지고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겠냐는 감성적 호소와 길이 갈라지고 패인 것은 애초 부실공사라서 그렇지 레미콘 트럭 지나간다고 길 망가지는 게 이게 제대로 된 길이냐고 쓴 소리도 했다. 그래서 어른들께 인사 겸 체면치레로 20만원 정도로 액수를 낮추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나서 뭐가 요상하게 꼬여갔다.

사람일이라는 게 예상과 빗나가도 이렇게 빗나갈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아래인 그 젊은 부부와 한동안 서먹서먹 하게 지내야 했다. 동회가 있던 날 그 젊은 남자도 함께 참석해서 노인들 틈새에서 처음에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을 하던 그가 내가 주장하는 얘기도 다 듣고 일이 잘 해결되자 여간 좋아하지 않았는데 관계가 꼬였다. 나는 공술 한 잔 얻어먹기는커녕 마음속으로 여전히 각별한 호의를 품고 있는데 어느 때부턴가 관계가 어색해졌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 집 차가 나갈 때 시내까지 좀 태워 달라고 부탁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집 여자가 남편에게 ‘우리가 뭐 새날이네 집 운전사예요?’라고 하더란 것이다. 이것으로는 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시내 나가는 차 좀 태워 달랬기로서니 그게 맘 상할 일인가 말이다. 내가 나중에 따로 짐작하는 된 이유가 있다.

아래윗집 살면서 큰 기침소리도 다 서로 들리는데 그 집 젊은 부부가 부부싸움을 몹시 거칠게 하는 편인데 원하건 원치 않건 내가 그걸 다 듣고 보고 하는 위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원인이었다. 여간 신경 쓰이지가 않았을 것이다. 창문을 꼭꼭 닫아도 옆집 오가는 사람 다 보이고 주고받는 말이 다 들린다.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낸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집 울타리를 고치느라 종일 마당에 있던 어느 날.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그 남자를 불렀다. 불러서 마시던 막걸리 한잔을 권했다. 나는 단연코 그 막걸리 속에 무슨 신비한 약을 탄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막걸리 한잔이 둘 어른관계 뿐 아니라 양쪽 집안 애들끼리도 잘 어울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막걸리 한잔의 위력을 실감했다.

막걸리 한잔의 위력

마을회관에 모인 동네 할머니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마을회관에 모인 동네 할머니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 전희식
최근에는 동네 이장이 좀 이상하다. 보름날 얼큰하게 술이 취한 이장이 나한테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유기농이 뭐고 생명농은 또 뭐냐는 것이었다. 이장님은 내 책이 나왔을 때 제일 먼저 한 권을 갖다 드렸고 그 집 두 딸이 내가 이 마을에 왔을 때 갓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멀리 인천으로 중등교사가 되어 발령받아 재작년에 임지로 떠날 때도 내가 인천에 임시 거처도 알선해 주면서 잘 지내던 분이다. 그래서인지 출판기념회 때도 부인이 시내까지 왔다.

시내에서 축협 조합장을 하다가 김성훈 농림부 장관시절 협동조합 개혁 때 농협과 통합되면서 마을로 돌아와 축산을 하며 지내는 사람인데 어쨌든 말하는 어투에서부터 심사가 편치 않아 보였다. 가만가만 물어보니 군에서는 물론 면에서도 내 책이 나오고 방송 인터뷰가 나오고 하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자기한테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모른다고 했으니 생명농법이 뭐고 유기농법이 뭔지 말 좀 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면에서 면서기가 두어 번 우리 동네 와서 우리 밭에까지 가 밀 자라는 것도 보고 거름자리도 살피고 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면서기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지 그랬냐고 했더니 이장은 얼버무린다. 그 면서기도 웃기는 사람이다. 나한테 직접 묻지 무슨 염탐하듯이 그러냔 말이다. 이럴 때는 유기농이 어떻고 자연농은 또 어떻게 다르고 했다가는 당장 “니가 그렇게 농사 잘 알어? 농사 몇 년 지었어?” 고성이 터져 나올 수 있다.

그냥 허허 웃고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귀농 10년 관록을 걸고 하는 소리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도 시골사람이 되어 가면서 익히는 삶의 지혜다. 이장이 이렇게 심사가 꼬여 있는 것은 언제 어떻게 무엇을 매개로 풀어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작년에 '풀밀어 귀농1호'로 콩밭은 매는데 이장이 기웃거리더니 농협농기계 교육 가서 본 얘기, 농업기술센타 연수에서 만져 봤다는 농기계 등을 거론하면서 내 보물단지인 '풀밀어 귀농1호'를 형편없는 농기계라고 흉을 봤다.

도시 물을 좀 먹은 사람들이 자기 실속 챙기느라고 마을공동체를 흐트러뜨린다는 말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몇 년 전에는 동네 부녀회장을 몇 년간 하던 할머니가 뒷산에 와서 양봉을 하는 양봉업자한테 매월 5만원씩인가를 뜯어내서 착복(?)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가지고 부녀회장을 바꿔버렸는데 아직까지 그 돈을 안 내 놓는다고 수군거린다. 그러면서도 어울릴 때는 서로 잊은 듯이 잘 어울린다.

겨울이 시작되면 면사무소 맞은편 공터에 공짜 싸구려 화장지를 쌓아 놓고 동네마다 봉고차가 들어와 사람들을 싣고 가는 약장수가 온다. 저녁을 일찍이 먹고 봉고차를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버스종점에 죽 늘어 선 줄 가운데는 전 부녀회장 할머니도 다정스레 어울려 수다를 떤다.

수군거림으로 익어가는 마을 인심

마을에 하루 너댓 번씩 들어오는 버스가 종점 땅이 좁고 흙탕길이라 땅을 넓히고 포장을 동네에서 하는데 누구는 땅이 몇 평 들어갔는데 누구는 끝내 땅을 안 내 놓아서 버스정류장이 삐죽하게 생겼다느니 말이 많다.

이런 수군거림과 비난들은 동네의 활기를 유지하는 기재들이다. 한 시도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작은 갈등들. 끊이지 않는 수군거림들. 이것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도 시골사람들만이 지니는 담력이고 배포다. 서로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담력이고 배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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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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