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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상황의 심각성

총선이 다가옴에 따라 많은 사람의 관심, 그리고 언론의 관심도 대체로 선거로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선거열풍의 뒷그늘에 묻혀 있는 요즘 우리네 삶의 문제들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관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으로 실업문제와 더불어 취업 근로자들의 문제, 특히 비정규직 근로자의 문제가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근로자는 1993년 491만명, 41% 비중에서 2003년에는 713만명, 50% 수준(노동계 추산으로는 전체 노동자의 56%인 800여만명; IMF 기준으로는 32.6%)으로 높아져서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치는 스페인과 함께 선진국(OECD)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근로자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30%를 넘어서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보는 IMF에서도 최근 한국 정부에 대책마련을 권고해 왔다.

그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상태를 보면 월평균 임금총액이 정규직을 100이라 할 때 2000년 53.7%에서 2003년 51.0%로 절반수준에서 그 격차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고, 각종 복지혜택에서도 소외돼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상의 불안정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노조결성률이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문제는 이 비정규직 일자리가 정규직으로 옮아가는 과정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한번 그 상태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덫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현실의 표현이 지난 2월 14일 울산 현대중공업 하도급업체 전 직원 박일수(50)씨의 분신 자살이었다.

지역의 상황

▲ 매일신문 3월 5일 사설
ⓒ 김재훈
한국 사회 전반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가운데 지역에서도 그 문제가 특히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대구시의 경우 현재 4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 지역의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범위와 깊이에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수준이다.

[매일신문] 대구 공공부문 비정규직 비율 전국최고 2004-02-24
(사설) 비정규직과 스페인 勞使모델 2004-03-05
[영남일보] 대구지역 비정규직 노조가입 급증 2004-02-23

전체 비정규직 가운데 공공부문의 경우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2003년 말 행정기관, 공기업 및 산하기관, 국립대학 등의 교육기관 등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 전국적으로는 18.8%를 차지(전체 근로자 124만9천명 중 23만4천명)한데 비해 대구시는 21.9%(전체 1만2천817명 중 2천809명)를 차지하여, 16개 지방자치단체 중 제주도 24.8% 다음으로 가장 높았던 것이다.

한편 식당종업원ㆍ환경미화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와 미조직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일반노조가 지난해 5월말 설립된 이래 10개월만에 노조가입 근로자의 숫자가 급증하여 2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구지역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노동계의 핵심사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민주노총 대구본부의 최근 노동상담 건수 중 70% 이상이 비정규직 관련 상담이고, 지난 2월 16일부터 열린우리당 대구시지부에서는 지난해 8월 해고된 대구여성노조 파미힐스 분회 노동자들이 복직문제로 단식농성에 돌입할 정도로 비정규직 노동자문제가 지역 노동계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비정규직으로라도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비정규직 확대방침을 밝혀 얼핏 생각하기에 실업문제를 포함한 전체 근로자계층의 생존권 문제 해결에 그 방침이 최선의 방안인 것 같은 생각에 잠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스페인의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스페인의 경우

스페인은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임시직(temporary worker)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국가이다. 2000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30%를 넘는 318만명의 노동자가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있다. 스페인이 이렇게 임시직의 비율을 높은 것도 실업률이 높아진데 대한 대응 과정에서 그런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은 1984년 실업률이 사상 처음으로 20%를 넘어섰고,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신규고용을 창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경직적인 스페인의 노동시장을 유연화 해야 한다"는 사용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됐다. 그래서 1980년에 제정된 '노동자지위법'에 대해 1984년에 이른바 '노동자지위법 개혁'조치를 취해, 모든 형태의 임시직 고용계약을 제한 없이 허용하면서 임시직 노동자들에게는 계약해지에 대해 법원에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법이 도입되자 유지비용이 높은 정규직 고용의 증가는 완전히 정체한 반면 임시적인 기간제고용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1985-90년 기간동안 1960년대 이후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대대적인 경기회복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15% 수준을 유지해서, 고실업 사태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1993년 경제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실업률은 24%까지 다시 치솟았고 실업자수는 37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임시직의 해고가 지나치게 자유롭게 됨으로써 조그만 경기하강에도 곧바로 급격한 고용감소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즉, 결국 스페인의 노동시장은 당초 임시직 고용을 자유화했던 시점보다 더욱 나빠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위기에 직면한 스페인 정부는 또다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이번에는 임시직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는 그대로 놔둔 채 오히려 1994년에 노동법을 개정하여 상용노동자에 대한 해고를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정당한' 해고 사유의 범위를 대폭 완화해 주었다.

그 결과 1996년 신규로 고용된 노동자의 무려 96%가 임시직이었으며, 임시직 고용의 70%가 3개월 미만의 단기계약이었다. 더구나 실업률도 거의 개선되지 않아 1996년 말까지도 전체 노동력 인구의 21.7%에 이르는 349만명의 스페인 시민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실업과 불안정고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사정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어 사회적인 혼란만 가중되어갔다. 이에 1997년에 스페인 정부와 사용자단체(CEOE), 두 노총(UGT와 CC. OO.)은 기존의 고용계약 시스템과 단체교섭 구조를 대폭 변경하는 내용의 중앙노사협약(4월 협약)을 맺고 그 합의를 곧 법률의 개정으로 이어갔다.

1997년 노동법 개정은 임시직의 고용을 억제하는 것에만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임시직을 정규직으로 유도하는데에도 초점을 둔 것이었다. 이른바 '정규직화 계약'이 도입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정규직 고용계약과 다른 점은 해고수당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인데, 부당 해고에 대한 보상금은 1년 근속기간에 대해 최저 33일분으로 줄어들었고 최고액도 24개월 분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25인 미만 사업체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해고에 대해서는 임금보장기금에서 해고수당의 40%를 부담하며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사용자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사회보장 분담료를 감액해주는 인센티브 조치를 부여하기로 했다.

나아가 1999년에는 임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특별한 혜택을 부여하도록 했으며, 기간제 노동자를 고용한 사용자에 대한 사회보험료 부담을 높여 정규직 전환을 촉진시키고자 했다.

2001년 현재 스페인 정부는 추가적인 제도개선을 모색하고 있는데, 임시직에 대해서도 해고보상금(최소 8일간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은 이런 제도 시행으로 지난 4년간 150만개 일자리를 창출했고 이중 76%가 정규직 채용방식이었다고 한다.

분배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부정적 영향

▲ 영남일보 2월 23일
ⓒ 영남일보
우선 시급한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조장한 결과가 근로자들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실업문제 해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스페인의 사례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거리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밀접한 만큼이나 사회적 통합이 절실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에 대해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이다. 그래서 때마침 IMF(국제통화기금)에서도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심각함을 경고하면서 최근의 스페인 노사모델을 권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정규직 근로자의 과도한 비중이 분배 측면에서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신분이 불안한 상태에서 노동자의 숙련을 축적해가기 어렵고, 결국 기술혁신의 잠재력이 축적되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중국을 비롯해 인도 브라질 등 저임금을 무기로 급속히 성장해오는 후발국(BRICS)의 추격에 대비해야 하며, 그 힘은 오로지 기술혁신에 있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고용구조가 이렇게 불안정한 비정규직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한국경제의 장래 성장잠재력을 고갈시키는 심각한 문제점을 갖는 것이다. 단기적 측면에서 기업의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 중장기적으로는 기업과 국민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오히려 죽이는 이율배반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번 총선과 관련시켜보면

이러한 심각한 문제에 대해 사용자를 대표하는 경영자총협회에서는 단기적 관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정부도 실업해소를 위해 비정규직 확대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조업에까지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전통적 제조업도 경영효율을 위해 이른바 ‘외주(outsourcing)’를 확대하고 있어서, 생산과정의 하청비율이 자동차산업 26.4%, 조선산업 49.6%, 철강산업 45.3%, 기계산업 239.6%에 이르러있다. 여기에 고용구조도 비정규직 중심으로 갈 경우 한국경제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른바 ‘지식경영’, ‘혁신주도 경제’가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을 당면한 총선과 관련시켜 생각해본다면 결국 개별 기업의 단기적 수익 추구에 연관되어 장기적 수익성을 저해하는 문제는 사회구조적 접근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가 도출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생활안정을 추구하는 노동자 대변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여 법률의 입법과정에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노동자의 복지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경제 전체의 장기적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의 성장은 단순히 시장의 상대가격 변화를 통한 자원배분 기능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술과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제도변화는 사회적ㆍ정치적 측면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견해를 참고해야 할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에 우리 모두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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