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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불법대선자금을 수사해온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서초동 대검찰청 15층 소회의실에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8일 오전 불법대선자금을 수사해온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서초동 대검찰청 15층 소회의실에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 검사직을 걸고 사즉생의 각오로 수사하겠습니다. 총장님은 최소한 불법대선자금에 대해 수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표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지난 2003년 10월 말,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대검찰청 8층 송광수 검찰총장실에 찾아가 송 총장에게 건넨 말이다. 안 중수부장은 결국 송 총장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며칠 뒤 검찰은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확대를 선언했다. 48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검찰이 대선자금이라는 '성역'에 대한 수사. 그것도 집권 1년째인 현직대통령도 직접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압박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간접적이지만 검찰에 오히려 더 압박이 될 수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경제상황이었다. 대기업이 주요 수사대상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 중수부장은 모든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검찰총장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사전에 송광수 총장의 약속을 얻어낸 것이었다.

이들의 우려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과 '검찰 편파수사에 대한 국회청문회'로 나타났다.

검찰은 11월 3일 김종빈 대검차장이 주재한 서초동의 한 고깃집의 점심 기자간담회에서 "국가혼란과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이 시점에서 부패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수사확대의 우려를 압도한다고 판단했다"며 전면수사확대를 선언했다.

지난해 4월 금감원에 SK계열사 조사 의뢰가 대선자금 수사 계기

이렇게 시작된 '전면적인 불법대선자금 수사'의 단초는 사실 2003년 초 서울지검 형사9부(부장 이인규, 뒤에 금융조사부로 개편)의 SK그룹 부당내부 거래와 비자금 조성 등에 대한 수사였다. 그해 2월 중순 검찰은 SK그룹의 오너인 최태원 회장 집무실과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전격압수수색을 벌여 최 회장 등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중요자료를 확보했다.

당시 검찰이 SK그룹의 비자금 사용내역서를 입수한 것이 불법대선자금 수사확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 검찰주변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인규 원주지청장은 기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 지난해 초 SK수사의 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형사9부가 당시 벤처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많이 했으나 기자들이 이에 대해 "큰 업체들은 못 건드리고 잔챙이만 터느냐"고 비웃음을 보냈다는 것. 이 청장은 '할 수 있다는 걸 한 번 보여주마'라는 생각에서 5대 기업 정도에 대해 대략적인 수준에서나마 문제점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대검 중수부가 본격적으로 SK그룹의 비자금과 대선자금 수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당시 중수부는 SK의 계열사였던 (주)아상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를 포착하고 금융감독원에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를 벌인 금감원은 그해 8월 대검에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이 맡고 있던 (주)SK해운의 아상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를 고발해왔다. 금감원이 고발해 수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검찰이 먼저 금감원에 조사를 의뢰했던 것이다.

중수부의 SK그룹 비자금 수사는 지난해 8월 29일자 <한겨레>의 'SK비자금 정치권 유입 수사 검찰, 손길승 회장 등 4-5명 출국금지‥관련정치인 곧 소환' 기사를 통해 공개됐다.

이어 10월 4일 검찰은 손길승 전 회장으로부터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대선자금으로 100억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앞서 이상수 의원에과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도 각각 30억원과 11억원을 건넸다는 진술도 얻어냈다.

10월 7일 검찰은 이들을 소환조사하겠다고 공개했다. 당초 공개시점은 며칠 뒤였으나 주간지인 <일요신문>이 이날 "최도술씨에 대해 출국금지가 내려져 있으며, SK비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함에 따라 발표시점을 앞당긴 것이었다.

최씨는 10월 16일 새벽 구속됐다. 바로 그날 안 중수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자금을 빙자해서 축재하고, 외국에 집 사고 하는 것은 가만히 놔둘 수 없는 것 아니냐. 어느 의원은 무슨 빌딩 가지고 있더라는 얘기를 많이 듣지 않느냐."

정치인들의 자금 유용을 질타한 안 중수부장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불법자금 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지난 2월 11일 오전 대검찰청에서 열린 '불법대선자금 의혹 등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송광수 검찰총장이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지난 2월 11일 오전 대검찰청에서 열린 '불법대선자금 의혹 등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송광수 검찰총장이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수사검사 20명, 수사관 120명의 매머드 수사팀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전면수사를 위해 검찰은 기업들에게는 '저승사자'로 불리는 이인규 원주지청장을 중수부로 데려와 기업수사를 맡겼다. 남기춘 중수1과장은 노무현 캠프와 민주당, 유재만 중수2과장은 한나라당에 대한 수사를 담당했다. 김수남 중수3과장은 수사 도중 불거진 썬앤문 사건과 굿머니 건을 맡으면서 별동대로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검사 20여명과 수사관 120여명이라는 매머드 수사팀이 구성돼 수사에 나섰다.

안 중수부장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인규 지청장은 이번 수사의 1등공신이다. 기업수사에 대한 노하우는 정말 탄복할 정도였다. 부장급 검사들 가운데는 최고라고 평할 만하다. '기업의 저승사자'라는 말이 맞는 표현이다.

남기춘 1과장은 우직하고 저돌적이고 정의감이 강했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한 비리 수사가 가능했다. 유재만 2과장은 차분하고 합리적이다. 그리고 사건 운도 좋았다. 그에게 걸린 건은 비교적 술술 잘 풀렸다. 김수남 3과장은 별동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지난 8일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 왼쪽부터 유재만 중수2과장, 이인규 원주지청장, 안대희 중수부장, 문효남 수사기획관, 남기춘 중수1과장, 김수남 중수3과장.
지난 8일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 왼쪽부터 유재만 중수2과장, 이인규 원주지청장, 안대희 중수부장, 문효남 수사기획관, 남기춘 중수1과장, 김수남 중수3과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인규 청장은 이번 수사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평했다. 중수부로 올 때는 어느 정도는 수사단서가 확보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단서를 찾아가는 단계였다는 것. 검찰은 "자수·자복하는 기업들은 선처하겠다"고 공표하면서 '자수하여 광명찾으라'고 압박했지만 기업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현금과 채권형태로 전달돼 계좌추적 역시 쉽지 않았다.

11월 말까지 검찰은 자금의 제공자인 기업체 압수수색 등에 주력했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11월 26일 안 중수부장은 이례적으로 "수사가 잘 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기업체 중심 수사에서 노 캠프와 한나라당 등 자금을 받은 쪽에 대한 계좌추적으로 방향을 바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채권 추적기술의 개가"

검찰은 이번 사건을 통해 검찰의 채권추적기술이 놀랍게 발전했고, 그 결과 증거를 갖고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입을 열 수 있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저인망식으로 사채시장을 훑어 300억원대의 삼성채권을 찾아냈다. 이 와중에 전재용씨가 관리해온 전두환 비자금 170억원을 찾아내는 망외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서정우씨는 '너희들이 완벽하게 관련자료를 갖고 오면 확인해 주마'하는 태도였고, 안희정씨는 이미 드러난 자금건도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10억원대의 자금의 출처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차떼기 등이 확인되고 불법자금 규모가 수백억원을 넘어가면서 검찰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올라가 검찰총장과 중수부장 개인에 대한 인터넷 카페가 생길 정도였다. 이 와중에 나온 12월 14일 노 대통령의 '1/10'발언은 검찰에게는 두고두고 수사 공정성에 대한 족쇄가 됐다.

수사팀의 한 검사는 "노 대통령은 그 발언을 통해 정치적인 고비를 넘겼지만, 검찰에게는 엄청난 진창이 됐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한나라당의 불법자금 규모가 속속 늘어날수록 노 캠프쪽의 불법자금을 찾아내야 한다는 검찰의 압박감도 심해졌다. 수사팀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우리도 의심이 간다"며 "그러나 기업들도 살아있는 권력인 현 정부에 대한 불법자금 제공을 털어놓기 힘들 것"이라고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안희정 삼성자금 30억 수수, 검찰의 히든 카드

검찰은 지난 3월 8일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삼성이 노 캠프의 안희정씨에게 30억원을 전달했다는 단서를 확보했다. 그러나 관련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삼성구조본의 김인주 사장은 음식물을 토하면서까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검찰은 발표전날인 7일 밤 11시에야 안씨의 확인진술을 얻어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8일 중간발표 시점도 오전 10시에서 오전 11시30분으로 늦춰졌다고 한다. 이 30억원 건은 8일 검찰 발표의 '앙꼬'였다. '검찰이 노 캠프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고 있다'는 편파수사 주장을 어느 정도는 무마시킬 수 있는 히든카드였다.

발표 당일 한 신문이 이를 보도한데 대해 검찰은 "몇 시간 있으면 발표할 내용인데 그렇게 보도할 수 있느냐",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문제"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렇게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대검 중수부의 불법대선 자금 수사는 한 매듭을 지었다.

8일 안대희 중수부장과 문효남 수사기획관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8일 안대희 중수부장과 문효남 수사기획관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수사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수사가 이대로 끝나지 않은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은 삼성과 현대차, 동부, 부영 등에 대해서는 불법대선자금 사건과 관련해 계속 수사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검찰은 현대차가 노 캠프에 제공한 불법자금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으며, 직접자금 제공에 개입한 총수들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등이 우선적으로 그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도 총선 이후 소환 가능성이 남아있다.

또 안대희 중수부장은 대선 당시 1억원이 넘는 지원금을 받은 지구당들에 대해서는 사용처 조사를 하겠다는 뜻을 세웠으나 현실적으로 수사가 어렵다는 주위의 만류로 일단 뜻을 접었다. 그러나 안 중수부장은 사석에서 "지구당 지원금의 상당액이 유용됐을 것이 분명하다"며 아쉬워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재벌기업들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이번 수사를 통해 상당한 자료를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계기만 주어지면 다시 수사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후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불법자금 모금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최측근 인사들인 서정우 변호사와 안희정씨의 모금에 대해 알고 있었으리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은 이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를 해 증거가 확보되면 총선 이후 이 전 후보 등에 대한 조사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총선 이후 중수부의 칼날이 다시 정치권과 재계를 겨누게 될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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