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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참 좋았다..
ⓒ KOKI
그때 우리는 알프스를 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프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길이만 17km에 이르는 성 고타드 터널. 달려도 달려도 출구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땅 속. 그때 우리는 땅 속을 달려 알프스를 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부부가 아니었으면, 그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터널 안이 아니라 어느 폐쇄된 도로였을 지도 모른다. 어느 이름 모를 알프스의 계곡에서 발이 묶여 있을 뻔했다.

▲ 브리엔츠 호수 너머로 보이는 알프스.
ⓒ KOKI
오후 2시 30분쯤이었을까? 그린델발트를 출발한 일행은 메이링겐을 거쳐 안데르마트로 갈 예정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도중에 6번과 11번 도로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야 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브리엔츠 호수를 지나 막 메이링겐을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교차로 한쪽에 군청색 차를 세우고 밖에 나와 있던 한 남자. 손을 흔들어 우리 캠핑카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그냥 지나칠까 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해코지를 당했다는 이야기,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을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독일이나 스위스는 상황이 좋다고는 한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데, 한눈까지 팔아서야 되나? 가던 길을 계속 갈까 했다.

▲ 멀리 구름 낀 알프스가 보인다.
ⓒ KOKI
유유히 교차로를 통과, 그래도 궁금증은 남아 백미러로 흘깃 아까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런데 이쪽에서 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 아닌가? 보조석에는 아내로 보이는 한 여인도 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 차를 세우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한눈 팔고 어쩌고 하기에는 너무 야박한 것 같았다. 해얼 형은 브레이크를 밟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익숙한 독일어라고는 "구텐 탁"이나 "구텐 모르겐"밖에 없었으니 도대체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지. 다만 독일어 사이로 몇 개의 영어 단어가 들려왔다.

"… 스노우… 슬리퍼리… 클로즈드… 루체른…."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을 여행하다 보면 느는 것이 손짓 발짓이요,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영어권이 아닌 바에야 그 한계는 더욱 뚜렷해질 뿐. 그 노인의 말을 우리 멋대로 해석해보니 대충 이랬다.

"지금 이 길은 눈(스노우)이 많이 내려 무척 미끄럽다(슬리퍼리). 그래서 이 길이 폐쇄됐다(클로즈드). 그러니 굳이 알프스를 넘으려면 루체른 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 알프스를 넘는 도로가 폐쇄됐다?
ⓒ KOKI
이런 뜻이 맞느냐고 영어로 물으니 "예스! 예스!"하며 맞단다. 라디오에서 그 사실을 듣고 여행자인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멈춰 기다리고 있던 참이란다.

독일 헤센 지방에서 왔다는 그 노부부는 이미 융프라우 캠핑장에서부터 우리를 보았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캠핑카가 독일 번호판을 달고 있던 데다가, 한 겨울에 동양인들이 캠핑카 여행을 하는 것이 낯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창 밖을 스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기는 하다. 라우터브루넨이나 그린델발트야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이니 그렇다해도, 브리엔츠 호수를 끼고 달려올 때 역시 며칠 전 이 길을 따라 들어올 때와는 달리 바람이 매우 차고 거셌던 것 같다. 실제로 머리 위로 보이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짙은 구름에 쌓여 있었다.

승희 형과 샘 형, 해얼이 형과 함께 떠난 이번 유럽 여행. 두 번 다시 하기 힘든 여행이라는 생각에 하루하루 적어갔던 일기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마터면 괜한 고생을 했을 수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지나간 일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고마운 경험을 하곤 한다.

아시아 고속도로, 밑그림 그린다

▲ 유럽에서 '1가 ○○○○' 혹은 '4라 ○○○○'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볼 수 있을까?
ⓒ KOKI
그런데 갑자기 이 일이 기억난 이유는 며칠 전 어느 신문에서 짤막한 기사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에피소드가 비단 우리 일행만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다. 우리야 비행기로 유럽에 도착한 뒤 캠핑카를 빌린 것이라지만, 이젠 '1가 ○○○○' 혹은 '4라 ○○○○' 번호판을 단 자동차가 그곳에서 비슷한 일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

한국에 돌아와 다시금 바쁜 일상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던 지난 2일. 신문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1단짜리 기사는 다음과 같다.

"아시아 고속도로 밑그림 그린다"

아시아 31개 나라를 하나의 길로 연결하는 '아시아 고속도로'의 밑그림이 유엔 차원에서 만들어질 예정이다.

건설교통부는 오는 4월 22~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제60차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 연례회의에서 '아시아 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한 정부간 협정 조인식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협정 내용을 보면 이 고속도로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이란 등 31개국을 연결하는 55개 노선 14만㎞로 구성될 예정이다. 우리 나라는 일본-부산-서울-평양-신의주-중국-베트남-태국-인도-파키스탄-이란-터키 등으로 이어지는 1번 노선(AH1)과, 부산-강릉-원산-러시아(하산)-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 등으로 이어지는 6번 노선(AH6) 등 2개 노선이 통과한다.

이번에 노선망, 설계기준, 절차, 효력 등에 대한 정부 사이 협정이 맺어지면 참여국들은 협정 내용에 맞춰 도로 정비를 하고, 도로안내 표지판에 노선번호를 추가하게 된다. 그러나 건교부는 아직 구상단계이며, 북한의 태도가 명확하지 않은데다, 핵심 쟁점인 국경 통과 문제 각국 예산 확보 등에 대해선 논의된 바가 없어 완공 시점은 예상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 한겨레 3월 2일자 강세준 기자 skang@hani.co.kr


ⓒ KOKI
그러고 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아니 북쪽 역시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철망으로 단절돼 있어 가히 섬과 같은 곳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새 문물은 주로 바다를 통해 또는 하늘을 통해 올 수밖에 없었다.

육로라면 남녀노소 빈부격차와 상관 없이 누구나 무엇이나 쉽게 이동이 가능했겠지만, 배 혹은 비행기를 거쳐야 했기에 교류할 수 있는 자는 자연히 그럴 '능력'이 있는 이로 국한됐다.

반도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반도일 수 없었던 우리. 섬과 같은 곳에 살면서 섬나라 특유의 외향성이나 개방성은 갖추지 못했고, 대륙이 아닐진대 대륙인양 생각하느라 그에 걸맞는 유장함 역시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 한국에서 기차를 타고 외국에 갈 수 있는 날은?
ⓒ KOKI
물론 기사는 이 계획이 아직 구상 단계이고 예산 확보 등의 문제는 물론 핵심 쟁점 중 하나인 국경 통과 문제 등이 걸려 있어 완공 시점은 예상하기 힘들다고 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논의가 시작될까 말까 하는 시점 아닌가.

하지만 지레 절망할 필요가 있을까? 한두개 나라도 아니고 31개 나라를 잇는 대공사이니만큼 시일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인간의 역사가 어디 그리 쉽게 진행돼 왔나?

긴 안목으로 보자. 그것이 언제가 됐든 이 거대 프로젝트가 현실이 되는 날이면 승용차에 온가족 태우고 가까운 베이징은 물론 이스탄불로 여행가거나 스위스에 가지 못할 법도 없다.

이제 아무나 따라 하기 힘든 '미애와 루이' 스타일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이 아니라, 맘만 있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새로운 문화와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혹은 손수 운전해 왕래하면서 때로는 처음 가는 길, 잘못 들어 곤란을 겪기도 할 테고 뜻하지 않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할 것이다.

▲ 기차 타고 프라하로 신혼 여행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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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작(?) 자동차 타고 여행이나 가자고 아시아 고속도로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고속도로 소식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갖고 올, 보다 원활한 교류와 그 속에서 자연히 열릴 우리의 가슴이다.

지금까지는 섬은 섬이되 섬이 아니라 착각하며 살아왔고, 개방성을 지녔다는 반도에 살고 있지만 대륙이라 착각하고 그 가능성을 외면해온 우리였다. 서울에서 아시아 고속도로를 타고 저 멀리 모스크바나 이스탄불까지 달릴 수 있게 되는 날, 이 안에서 이렇게 복작대며 '살아내는' 우리들의 사고 범위도 그만큼 넓어지지 않을까.

그나저나 아시아 고속도로가 언제 만들어질지 누가 아느냐고? 인간이 화성에 발을 내딛는 날에나 가서 한번쯤 따져볼 일이라고? 지난 4일 신문에 실린 또 하나의 1단짜리 기사를 보면, 그 날이 그렇게 멀어 보이지도 않는다.

"남북, 경의선 도로 상반기 개통 의견접근"

제8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남북 양측 대표단은 올해 상반기 중 경의선 도로 개통식을 갖자는데 의견접근을 이뤘다.

남북 양측은 3일 오전 10시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첫 전체회의 갖고 기조발언을 교환, 남측은 6.15 4주년을 맞아 경의선 도로를 개통하자고 제의했으며 북측은 올해 상반기 중 도로 연결의사를 밝혔다.

박흥렬 남측 회담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현재의 공사상황으로 봐서는 경의선 도로가 가장 진척이 많이 됐다"며 "북측도 노반공사를 완료했고 포장만 되면 개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회의에서 남측은 기조발언을 통해 ▲개성공단 건설,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사업, 금강산 관광사업 등과 관련한 후속협의 일정 ▲직거래사무소 개성공단 내 개설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경제시찰단 교환 등을 북측에 제안했다.

북측은 기본발언을 통해 공동선언 이행 차원에서 남북간 경제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임을 밝히면서 남북간 철도·도로연결사업과 개성공단 건설사업의 추진 의지를 표시했다.

- 한겨레 3월 4일자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 한국고속철도. 한반도 남난에서 출발, 유라시아를 달릴 날이 올까?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1. 더 많은 사진은 www.finlandia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KOKI'는 권기봉, 박해얼, 샘, 최승희가 함께 하는 여행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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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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