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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7년 10월 25일자에는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을 홍보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명칭이 공식 채택된 것은 1911년 4월 26일이었는데, 기사 내용을 보면 그 후로도 일반 시민들은 입에 익은 '어원(御苑)'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의 간판은 이왕직 장관 민병석 자작의 글씨이다.
<매일신보> 1917년 10월 25일자에는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을 홍보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명칭이 공식 채택된 것은 1911년 4월 26일이었는데, 기사 내용을 보면 그 후로도 일반 시민들은 입에 익은 '어원(御苑)'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의 간판은 이왕직 장관 민병석 자작의 글씨이다.
동물원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가고 또한 벚나무가 그득했던 유원지의 모습을 걷어낸 자리에다 궁궐의 외형이나마 되찾아 창경궁이란 이름으로 거듭난 것이 1986년 8월이었다. 그럭저럭 2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입에서 먼저 맴도는 단어는 '창경원' 일 때가 있다.

일부러 그러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추억 속에 어른거리는 것이 '창경원'인 탓이 아닌가도 싶다. 심하게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누구는 난생 처음 보는 동물원의 모습으로, 누구는 수학여행 때의 아련한 모습으로, 누구는 청년 시절의 풋풋한 감정으로, 또 누구는 행락 인파 속의 가족 나들이라는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창경원이기 때문이다. 사실 창경궁은 그렇게 좀 묘한 공간이다.

그 뿐이 아니라 '창경원'이 창경궁을 꿰어찼던 기간은 일반 공개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909년부터 1983년까지였으니, 얼추잡아 7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된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원형 복원을 추진하더라도 창경원 시절의 잔영을 말끔히 씻어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진다.

원래 이왕가 박물관 본관이었던 장서각 건물을 1992년 11월에야 뒤늦게 헐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창경궁 안에는 춘당지(春塘池)가 남아 있고, 대온실, 중국에서 건너온 보물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또 언제 반입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오층석탑 하나도 명정전 뒤편에 남아 있다.

그리고 장서각 자리에서 춘당지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역시 창경원 시절이 남겨놓은 흔적의 하나이다. 궁궐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태실'이란 것도 어색하거니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것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국왕의 태실로는 드물게 경기도 지방에 있던 성종 태실비가 이왕직(李王職)의 손을 거쳐 이곳 창경원으로 옮겨졌는데, 그때가 바로 1928년이었다. 안내문에는 흔히 1930년 5월에 옮겨온 듯이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국왕의 태실로는 드물게 경기도 지방에 있던 성종 태실비가 이왕직(李王職)의 손을 거쳐 이곳 창경원으로 옮겨졌는데, 그때가 바로 1928년이었다. 안내문에는 흔히 1930년 5월에 옮겨온 듯이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 이순우
국왕의 태실이, 그것도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태실이 창경원으로 옮겨진 것은 그것이 가장 상태가 좋다 하여 태실의 표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 이상 태실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의 야외진열품이었던 것이다.
국왕의 태실이, 그것도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태실이 창경원으로 옮겨진 것은 그것이 가장 상태가 좋다 하여 태실의 표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 이상 태실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의 야외진열품이었던 것이다. ⓒ 이순우
그런데 알고 보면 여기에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식민지 시대의 애환이 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창경원으로 옮긴 것은 1928년의 일이었다.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에는 구태여 그 무거운 석물들을 옮겨온 까닭에 대한 기사 하나가 남아 있다.

"태봉에 암장시(暗葬屍)가 뒤를 이어 발견됨을 따라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신중히 협의한 결과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의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석물이고 건물이고 한결 같이 창덕궁 뒤 비원에다가 꾸며놓고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는데 새로이 건설되는 태봉은 성종태봉을 표본으로 경중히 뫼실 것이라 한다."

전국 각처에 흩어진 태항아리의 수습 사실을 적고 있는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이다. 기사의 왼쪽에는 성종 태실이 표본으로 선정되어 비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도 담고 있다.
전국 각처에 흩어진 태항아리의 수습 사실을 적고 있는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이다. 기사의 왼쪽에는 성종 태실이 표본으로 선정되어 비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도 담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면, 그 무렵에 이왕직에서는 전국 각처에 흩어진 왕실 태항아리를 수습하여 서울로 옮겨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개 태실의 석물은 현지에 내버려둔 채 태항아리만을 수습해 오는지라 그 모습을 보전하기가 힘드니까 개중에 상태가 가장 좋은 성종태실 하나만을 골라 석물 일체를 창경원 쪽으로 옮겨오기로 했다는 그런 얘기이다.

그 시절에 수습되어 온 왕실의 태항아리는 우선 시내 당주동 128번지의 이왕직봉상소(李王職奉常所)에 임시 봉안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모두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원래 명당만을 골라 모셨을 태실 자리를 포기하고 구태여 태항아리를 한곳에 모으려고 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망국의 왕실이 겪어야 할 업신여김의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두고 반드시 이왕직의 만행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던 듯이 보인다.

일제 시대에 이왕직은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왕실 태항아리를 일제히 수습하여 서삼릉에 옮겨 놓았으니, 그때가 1929년 봄이었다. 위 사진은 지난 199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서삼릉 태실구역을 발굴조사하여 재정비하던 당시의 모습이다. 현재 이곳은 비공개 구역으로 남아 있다.
일제 시대에 이왕직은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왕실 태항아리를 일제히 수습하여 서삼릉에 옮겨 놓았으니, 그때가 1929년 봄이었다. 위 사진은 지난 199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서삼릉 태실구역을 발굴조사하여 재정비하던 당시의 모습이다. 현재 이곳은 비공개 구역으로 남아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그 당시의 기록을 확인해 보자. 무엇보다도 이 일을 관장한 이왕직의 전사(典祀) 이원승과 유해종이 전국 각처의 태실을 순방한 것이 1928년 8월 무렵이었고 또한 그 때가 순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러니 태실 정리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던 시점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에 봉안했던 순종의 태실조차도 1928년 8월 18일에 봉출했다가 홍성군청을 거쳐 그 다음날 서울로 옮겨진 대목에서도 왕실의 위세가 전혀 작용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디랄 것도 없이 태실의 관리 현황이 너무 엉망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돌아다녀 본즉 역대 국왕의 태실은 여러 곳이 이미 도굴을 당했고, 심지어 태실이 명당이라 하여 그 자리에다 민간인들이 시체를 암장한 곳도 수두룩한 지경이었다. 그러니 온전하게 태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태항아리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명분이 고스란히 먹혀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령 충남 예산의 현종(顯宗) 태실은 태항아리마저 온데 간데 없었고, 충남 홍성의 순종 태실에는 암매장한 시신 두 구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진 역대 국왕의 태실 가운데 소화(昭和) 연호가 새겨진 탑지와 더불어 신규 제작된 외호(外壺)에 담겨져 태항아리가 모셔진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풀이된다.

아직도 창경궁 안에 남아 있는 '창경원' 시절의 흔적들이다. 차례대로 창경궁 대온실, 춘당지와 팔각칠층석탑, 성종태실비, 명정전 뒤 오층석탑의 모습이다. 이 가운데 오층석탑 같은 것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반입된 것인지조차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아직도 창경궁 안에 남아 있는 '창경원' 시절의 흔적들이다. 차례대로 창경궁 대온실, 춘당지와 팔각칠층석탑, 성종태실비, 명정전 뒤 오층석탑의 모습이다. 이 가운데 오층석탑 같은 것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반입된 것인지조차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처지이다. ⓒ 이순우
결국에 대다수 역대 국왕과 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져 마치 공동묘지와도 같은 음산한 형태의 군락을 이루게 된 데는 그러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창경궁으로 옮겨진 성종의 태실은 말이 태실이었지, 그저 이왕가 박물관의 야외 진열품으로 전락한 처지로 남겨졌던 것이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창경원은 다시 창경궁이 되었고 이왕가 박물관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이제 성종 태실은 딱히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 성종 태실이 더 이상 궁궐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의 처리가 어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원래 창경궁이란 것이 성종 14년 즉 1483년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라 하였으니, 성종 태실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혹여 그러한 인연이 작용한 탓은 아니었을까?

태실 관련 자료 안내

일제시대에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실군의 현황과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태실 석물의 연혁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참고자료 몇 가지를 따로 적어둡니다.

우선 서삼릉 태실에 관한 종합적인 발굴조사보고서로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1999)이 있고, 이와 관계된 연구논문인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변천연구> (단국대 석사학위논문, 2000)과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석물에 관한 일연구", <문화재 제33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등에도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왕직에 의한 태실이봉의 내용을 담은 일제시대의 신문자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신보> 1928년 8월 19일자, "인조조 왕남 태봉발견, 광주 서방면"
<동아일보> 1928년 8월 22일자, "순종태실이안, 홍성의 태실을 옮겨모셔 19일 경성에 봉환"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 "각지 명산에 뫼시었던 이왕가 선대 태봉이봉"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 "신설한 표본은 성종의 태봉"
<매일신보> 1929년 3월 1일자, "역대의 태옹 서삼릉에 봉안, 얼음풀리면 곧 착수, 전부 39개"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정리한 <유리원판목록집 III> (1999)에는 이 당시 반출된 태항아리와 지석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다수 남아 있습니다.

끝으로 현재 서삼릉으로 옮겨진 역대 국왕의 태실 가운데 현지의 잔존한 석물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경우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태조대왕태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31호),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세종대왕태실지 (경남 기념물 제30호),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문종대왕태실비 (경북 유형문화재 제187호),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단종태실지 (경남 기념물 제31호),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예종대왕태실 및 비 (전북 민속자료 제26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경기전
명종대왕태실 및 비 (충남 유형문화재 제121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선조대왕태실비 (충남 문화재자료 제117호),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오덕사
숙종대왕태실비 (충남 문화재자료 제321호), 충남 공주시 태봉동
경종대왕태실 (충북 유형문화재 제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영조대왕태실 (충북 기념물 제69호),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정종대왕태실 및 태실비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순조대왕태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1호),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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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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