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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옥
비서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이미지로 요약된다. 남성들에 의해 부풀려진 할리우드형 판타지나 가부장제에 의해 강화된 가정부형 판타지. 짧은 스커트 정장차림의 매혹적인 외모, 밀월 등의 연상은 전자의 경우이고 커피 타기와 잔심부름은 후자의 경우다.

물론 이 같은 이미지는 편견이 낳은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비서에는 ‘전문비서’도 있고, 일반 비서직이라 할지라도 매우 중요한 경영 파트의 일부를 수행하는 직업인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부장적 기업경영의 형태에서 파생된 비서직에 대한 편견은 견고하다.

이 같은 편견은 비서직에서의 남녀 비율을 살펴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전국의 비서학과(경호비서학과 제외)가 설치된 39곳의 대학(2년제 및 4년제 대학) 중 전체의 25%에 이르는 10개 대학이 여자대학이며,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남학생 비율은 수치를 집계할 수 없을 정도다.

교육·직장현장 성비불균형 극심

경원전문대학교는 비서과 40명 정원 중 매년 남자 신입생 수가 1∼2명에 지나지 않고 비교적 남학생이 많은 부천대 비서행정과도 5∼1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 같은 비서직 종사자 남녀 성비의 엄청난 불균형은 실제 직장 현장에서는 더 심해진다.

업무적 특성이라는 편견이 낳은 이 같은 성비 불균형이 어떤 문제점을 낳는가는 간호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간호사 역시 고정적 성 역할 편견이 심각한 직업인데, 이 같은 편견으로 인해 엄청난 불균형이 쉽게 바로잡히지 못하고 있는 것.

보건복지부 관계자에 따르면 2003년 10월 현재 보건복지부에 등록돼 있는 간호사 면허 취득자는 19만2223명이고 이중 남자 간호사는 750명으로 0.04%에 지나지 않는다. 1970년대 중반에 첫 남자 간호사가 배출된 것을 고려해보면 성 역할적 편견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같은 심각한 간호사의 성비 불균형은 직업적 전문성 심화에도 부정적 역할을 하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병원 현장에서 비인권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보건의료노조가 전국 36개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등 여성근로자 15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병원 내 폭언 폭행 및 성희롱에 관한 설문조사 에 따르면 여성 근로자의 39.8%가 폭언 폭행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폭언 폭행 가해자로는 환자 또는 보호자가 41.2%로 가장 많았지만 그 뒤를 이어 의사(33.7%)나 부서 내 상사(11%), 직원 또는 동료(9.3%) 등의 순으로 나타나 직업별 성비에 따른 성차별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성 역할 편견에 따른 직업군의 성비 불균형은 사회가 이를 확대재생산해내는 악순환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사회가 점점 평등주의적 구조로 변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별에 따라 적합한 직업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쉽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국가기술 자격검정의 비서시험 소개를 살펴보면 비서직이 결코 여성 고유의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급은 일반상식 경영학원론(비서실무 생활영어는 공통), 2급은 일반상식 경영학개론, 3급은 일반상식이며, 실기는 워드프로세서·컴퓨터활용능력·컴퓨터 한글속기(연설체, 논설체) ·한글속기(수필체, 연설체, 논설체) 등으로 이뤄져 있다. 어디에도 특정한 성에 맞는 직업적 특성을 발견할 수 없고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는 비서 업무도 성별적 특성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남성은 밖에서 일하고 여성은 내조한다는 가부장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직장 내의 간부들이 대부분이라는 축적된 사회적 환경이 비서직의 여성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채용모집부터 남성 원천봉쇄 당해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인터넷 취업 사이트 ‘잡코리아(www.jobko rea.co.kr)’ 구인란에 뜬 50여개의 비서직 구인 소개를 살펴보면 무려 84%에 해당하는 42개 업체가 여비서만을 모집했고, 이중 절반이상이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을 단서조항으로 앞세우고 있다.

이 같은 비서직 채용공고는 모집·채용에 있어서 성별에 따라 고용 기회를 주지 않거나 연령·용모 등에 제한적인 조건을 부과하는 경우, 응모자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그 개인이 속한 성별 집단에 대한 일반적인 속성에 근거하여 채용 기회·조건·방법 등을 달리하는 경우, 같은 사업장에 근무하는 근로자집단, 모집의뢰인 또는 고객의 선호를 이유로 성별에 따라 채용을 거부하는 것을 금지하는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과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79. 1. 1. 이후 출생한 여성으로 인문계열의 4년제 졸업자 및 2004년 졸업예정자.” “비서직에 적성이 있고 용모 단정한 자.”

이 채용공고는 국내의 한 유명 법률회사의 비서 모집 요강이다. 법을 다루는 법률회사에서조차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의 소지가 있는 남성중심의 보수적 채용 관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J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한 여비서에 따르면 애초 채용에서부터 남자를 뽑지 않는다고 했고 면접에서도 여성스러운 외모, 다소곳한 태도 등이 중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성 역할 고정관념 여성부터 바꿔야

연세대학교 문화학 협동과정 나윤경 교수는 “남녀학생의 커리어 계획을 비교해 보면 두 집단은 ‘상상하는 내용’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의식의 차이가 비서직에 대한 남녀 선호도의 차이를 낳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대다수의 남학생들은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직업, 지휘하고 지배하는 역할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고 희망직업으로 비서를 택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며 “반면 아직도 상당수의 여학생들은 자신을 생계부양의 주체로서 의식하는 정도가 낮으며 리더가 아닌 보조적인 위치의 직업,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역할의 직업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있다”고 현실을 전한다.

나 교수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그러한 편견을 강화시키고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며 여성으로부터의 의식개혁을 강조한다. 남성이 비서로 일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고 심지어 우습게까지 여기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은 남성에 대한 또 다른 차별과 억압이며 여성 자신을 비하하는 자기 모순이라는 것이다.

“전공이나 성별보다 개인 소양 최우선”
전문비서 7년차 홍관영씨

기업에서 근무하는 남성 비서는 일반인이 흔히 아는 비서와는 출발부터가 다른 경우가 태반이다. 여성 비서들은 비서(학)과를 졸업한 뒤 비서시험을 통해 입사해 퇴직까지 비서로 근무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반면 남성 비서들은 타부서에서 일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모 기업체에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홍관영(35)씨도 그런 경우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마케팅 부서로 입사해 1년6개월 동안 근무한 뒤 비서실로 옮겨 근무하던 홍씨는 올해 부서장 직함을 받고 대표이사 사장과 관련한 전체적인 비서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남성 비서. 왠지 덩치 좋은 ‘떡대’가 떠오른다. 비서가 아니라 경호원이겠지.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 있던 기자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굵게 진 쌍꺼풀에 선이 고운 얼굴, 자그마한 체구, 강함보다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남성 비서에 대한 편견이 모조리 깨지는 순간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와 마주앉았다. 홍 비서실장은 “두 분 모두 출장을 간 직후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개인적인 스케줄보다는 모시는 분에 따라 출퇴근 시간이 결정되는 비서이기에 일년에 한번 있을법한 기회이다.

“모시는 분의 출장 시 10시 비행기를 태우려면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핸드폰 알람을 4번 울리도록 맞춰놓고 잠자리에 들죠. 긴장감에 새벽 1시가 넘으면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사히 출장을 떠나면 그제야 눈을 붙일 수 있죠.”

비서직의 애환이랄까. 어려움을 토로하는 그이지만 직업적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다. 그 때문에 ‘임원과 친하다’ ‘버릇이 없다’ ‘비서는 하는 일이 없다’ 등 비서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편견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보좌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해야 가능한 일이 비서업무”라는 홍 실장은 “비서는 어느 학과를 나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소양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서는 충성스럽고 헌신과 봉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늘 자신의 시간보다는 상사의 시간을 우선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 실장은 또 “대표이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비서이기에 얘기가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다른 부서와 친근하게 지낼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다.

6년 7개월 동안 비서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홍 실장은 “거울을 보고 인사하면서 각도를 점검할 만큼 늘 마음가짐을 바로잡는다”며 “비서직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비서로서의 기본 소양이 가장 큰 덕목이라는 것이다.
/ 우타 최정화 인턴기자

“보좌업무 적성맞아, 다양한 업무습득 미래 밝다”
부천대 비서행정과 김동욱씨

부천대학 비서행정과 2003학번 김동욱씨는 같은 과 250명의 학생 중에서도 ‘귀한’ 몸 중에 한 명이다. 250명 학생 중에 남자는 4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바라던 꿈을 확실히 이루기 위해 비서행정과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김씨는 “일을 주도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서포트를 해주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기 때문에 비서를 지망한다”고 설명한다.

‘청4점’이라고 해서 특혜나 불이익을 받는 법은 없다. 여학생이 많다고 해서 여학생 위주의 수업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비서행정과 자체가 성별과는 무관한 교육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용감하게 금남(禁男)으로 여겨지는 사회의 그릇된 인식의 벽에 도전한 ‘청4점’이 교수들에게 관심을 더 받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일 터다.

현재 군 입대를 위해 휴학 중인 김씨는 경호비서를 위해 여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경호비서든, 일반 비서든 그에게는 마찬가지지만 사회가 남성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경호와 비서 업무를 동시에 하는 전문비서인 경호비서이기에 선택한 길이다.

김씨는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비서를 해서 어디까지 성공할 수 있겠느냐, 모시고 있던 상사가 해고되면 불이익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많이 들었다”고 전한다. 심지어는 “남자가 청소하고 차 심부름 등 자질구레한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김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직업일 뿐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세상의 편견쯤은 감수할 각오가 서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서직이 다양한 업무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 오히려 장래성이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는 김씨는 246명이나 되는 ‘여인천하’에서 자신의 단점을 바로잡는 수확을 얻었다고 소개한다. 여성 학우들에게서 꼼꼼하고 세심하게 일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거친 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는 것. 놀기 좋아하고 장난 좋아하는 그에게는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1학년 때는 이론, 2학년 때는 실습 위주로 진행되는 비서행정과의 수업은 딱딱하기보다는 자유롭고 재미있게 이루어진다고 소개한 김씨는 훌륭한 비서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 우타 이송희 인턴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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