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정철용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오클랜드시의 자매시인 중국 광저우시에서 만들어 보낸 이 등불이다. 올해의 주인공 원숭이가 물병을 기울여 안에 든 것을 쏟아 붓고 있는데 그 물병의 주둥이에서 쏟아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금빛 동전들이다.

'새해에는 부자 되세요!' 지난 해 한참 유행했던 새해 인사를 이곳 오클랜드에서 올해 만난다.

ⓒ 정철용

그러나 아무리 원숭이가 재주를 잘 부려도 길한 동물로는 용을 으뜸으로 친다. 전체 몸길이가 10m는 족히 될, 공들여 제작한 용 한 마리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첫 번째 발에 쥔 여의주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다.

특히 아내와 나는 동갑내기로 둘 다 용띠이니 용의 모습을 한 이 등불 앞에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다.

ⓒ 정철용

그랬더니 양띠인 딸아이 동윤이는 자기도 질 수 없다며 우리의 손을 잡아끈다. 털이 모두 깎인 양들이 함께 모여 있다.

뉴질랜드에는 사람 수보다 양들 수가 몇 배나 더 많다고 하니 양들의 모습을 한 등불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랜턴 페스티벌에 매년 나올 만도 하다. 작년에도 동윤이는 환하게 불 밝힌 양들 앞에서 오래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정철용

그런데 올해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온 동윤이의 눈을 더 사로잡는 것은 양들이 아니라 판다 곰이다. 중국 특산종인 귀엽게 생긴 판다 곰 앞에서 아이들은 떠날 줄을 모른다.

동물원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동물이니 많이 보려무나. 그 앞에서 아내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 정철용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들어보니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의 이중주다.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우리는 그 음악의 주인공들을 찾아냈다. 귀엽게 생긴 거북이들이다.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가기만 할 뿐 잘 하는 것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악기를 연주할 줄 알다니! 두 발로 떡하니 버티고 서서 바이올린을 켜대고 클라리넷을 부는 거북이들이 너무 귀엽다.

ⓒ 정철용

한참 그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목이 마르다. 이럴 땐 깡통에 든 차가운 탄산음료보다 따스한 차 한 모금이 훨씬 더 해갈에 도움이 될 텐데.

앗, 그런데 정말 그런 차가 있다. 매화 문양이 그려진 이 고풍스런 주전자에 지금 따스하고 향기로운 중국차가 가득 담겨 있다. 그것을 조금 따라서 마신다.

ⓒ 정철용

따스한 차를 마시고 있자니 조금 더워진다. 아직 이곳 뉴질랜드는 한여름이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렸으니 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위 걱정도 한 순간. 우리는 금방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아냈다. 바로 커다란 부채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 아래. 환하게 불 밝힌 그 부채 아래에 서 있으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준다.

ⓒ 정철용

부채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뒤통수가 괜히 땡기는 것이 느낌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돌아보니 정말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얼굴만 남은 마스크 하나가 슬픈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해주련? 물어봐도 그는 대답이 없다.

ⓒ 정철용

점점 어두워져서 마침내 하늘은 깜깜해지고 올려다보는 곳마다 마치 잘 익은 호박처럼 주홍빛 등불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붉은 등불을 보고 있자니 장이모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홍등>이 떠오른다.

그 붉은 등불 아래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묻는다. 여기가 뉴질랜드인가, 아니면 중국인가. 그러나 왁자지껄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들리는 키위식 액센트가 섞인 영어를 듣고서 나는 이곳이 뉴질랜드임을 확인한다.

ⓒ 정철용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처럼 옷을 잘 차려입은 원숭이가 쭉 뻗은 나무줄기에 붙어서 그 사람들의 물결을 쳐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은 난생 처음 보았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 뒤의 원숭이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원숭이의 해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사실이 몹시도 즐거운 모양이다.

밤 10시가 가까이 되어 행사장을 빠져나오는데 그 시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돌아서 보니 나무들의 검은 실루엣 속에 떠 있는 등불들이 마치 꿈처럼 밝혀져 있었다. 수많은 원숭이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면서 그 꿈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기운차게 나무를 옮겨 다니는 저 원숭이들처럼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기를, 언제나 웃는 얼굴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저 원숭이들처럼 새해에는 모두 즐거운 일만 생기기를, 나는 아련히 멀어져가는 등불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빌었다.

덧붙이는 글 | 랜턴 페스티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이 행사를 주최하는 아시아 2000 재단의 웹사이트(www.asia2000.org.nz)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