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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상 시상식에 등장한 탈곡기로 나락 타작을 하는 모습
풀꽃상 시상식에 등장한 탈곡기로 나락 타작을 하는 모습 ⓒ 전희식
여름 해변에서 신나게 수영을 하고 나온 사람에게 해수욕 이야기 좀 해 달랬더니 태평양 크기가 어떻고 대서양의 어종은 또 어떻고 해 싸면 한낮 땡볕도 무색하게 썰렁해진다. 농사짓는 농부한테 논 이야기 좀 들어보려고 했더니 논의 저수 기능이 어떠네, 토양손실 방지효과가 어떠네, 자연경관 조성이 어떠네 하면 멀쩡하던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논 때문에 속이 푹푹 썩고 있는 농부에게 논을 노래하라고 하고 세월의 속도보다 빠르게 시세가 떨어지고 있는 천덕꾸러기 논에게 상을 다 주니 농부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논에게 상을 주다니!

그동안의 쌀농사 직불제가 진화(?)를 거듭하더니 올해부터는 쌀농사에 근근히 목을 매고 있는 시골 노인네들을 아예 농사에서 손을 떼게 하는 작전에 들어가고 있다. 지불금을 높이는 대신 논농사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한다.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농촌 못살게 굴기 운동은 수십 년 전부터 벌어졌고 이제는 농사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논농사를 겨냥하고 있다. 뼈 빠지게 논농사 지어도 벌까 말까 한 돈을 거저 주겠다고 한다. 대신 논을 죽이라는 것이다.

이것 참! '풀꽃상'을 받은 논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논의 처지가 쪼그라진 농가 살림살이 못지 않게 딱하기만 하다.

논은 이제 친구가 없다 휴식도 없다

행사도중 환하게 웃는 어느 회원
행사도중 환하게 웃는 어느 회원 ⓒ 전희식
저녁 무렵 어둑발이 지면 악동들은 주인 몰래 도랑물길을 터서 겨울 논에 물을 들인다. 다음날 꽁꽁 언 논에서 신나게 미끄럼도 타고 팽이도 치면서 놀이판을 벌이면 온 동네가 왁자지껄해진다. 논 구석을 삽으로 파면 지게 작대기 굵기 만한 미꾸라지가 '솔찬히' 나온다. 모닥불에 즉석 미꾸라지 구이가 벌어진다.

논 주인이 뒤늦게 알고 나타나 지팡이로 애꿎은 땅바닥만 퍽퍽 내리치다가 다음에 또 그러면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린다고 엄포를 놓고는 돌아간다. 아이들은 어지럽게 섞여 노느라고 한 마디도 귀에 안 들어온다.

겨울 논에는 밀과 보리가 새파랗게 자라고 있든지 이처럼 언 손을 호호 불며 함께 노는 아이들이 버글대던지 했다. 옛날에는 말이다.

오늘 농촌의 빈 들판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죽음의 회색뿐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시설하우스에 숨통이 막혀 사시사철 쉴 틈도 없이 착취당하는 땅의 숨 넘어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논 이름도 참 많았다. 역시 옛날 얘기다. 산비탈을 따라 만든 ‘다랑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가 와야 모를 심는 ‘천수답’도 있었다. 물 걱정 없는 동네 앞 논 이름은 ‘몽리답’이었다. 사람마다 부르는 게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천둥지기’를 ‘봉천(奉天)지기’라고도 불렀다. ‘수전(水田)’이라고 하면 논인 줄 안다. 겨울 내내 물이 들어 차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논은 ‘무논’이다. 집터에 딸린 논은 ‘텃논’이라고 불렀다. 고래논도 있었다. 논에 샘이 있어 물이 솟는 논을 말한다.

지금은 모두 통일되었다. 그냥 ‘논’이란 이름으로. 적대적 강제합병이다.

풍물공연
풍물공연 ⓒ 전희식
논 이름만 사라진 줄 아는가. 논과 함께 불리어지던 그 많은 이름들도 다 사라지고 없다. 논의 친구들 말이다. 쓰레질, 모춤, 샛요기, 못줄, 논배미, 마지기, 한 섬 두 섬, 거울 베기….

논에서 들려오던 여러 소리들도 사라지고 없다. 소 모는 소리, 개구리 소리, 구성진 농부가도 더는 들을 수 없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지도 오래다. 젊은이들의 잠자리에서 아이들이 만들어지는 법. 노인네의 잠자리에서는 마른 살비듬만 소복하다.

미꾸라지도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다. 고둥도 없어졌고 메뚜기도 보이지 않는다. 장딴지를 물고 늘어져 피를 빨던 거머리가 그리워 질 지경이다.

마르지 않는 저수지

모두가 떠나 가버린 논은 '풀꽃상'을 받아도 축하해 줄 친구 하나 없다. ‘풀꽃상’에 부상으로 '벅적지근한' 술상을 받았다 한들 대작할 친구가 없는데 무슨 맛이겠는가. 반세기도 채 안 되는 짧은 세월에 누가 이 땅 이천년 역사의 논농사를 이렇게 초토화 시켰는가? 누가 논의 친구들을 '싸그리' 소탕 해 버렸는가?

바로 당신이다. 풀꽃상이라는 기막힌 행사치레로 탐욕과 파괴를 앞가림 하려는 당신이다.

우리 동네 저수지 물은 일년 내내 철철 넘친다. 아무리 가물어도 저수지 바닥을 보기 힘들다. 논에 물꼬가 틀어 막힌 지 오래여서 그렇다. 논에는 언젠가부터 벼가 자라는 게 아니라 꽃나무가 자라고 생강이 자라고 시설채소가 자라고 있다. 저수지 물을 쓰던 논들이 다 변절(?) 해 버렸다. 배신을 때렸다. 그래서 논 값은 밭 값보다도 싸졌다. 밭으로 변한 논에서는 돈벌이 작물들이 자란다. 논이 상품 씨받이로 전락했다. 오로지 팔기 위한 작물들은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논은 불량상품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 동네 입구에 한 마지기 당 쌀 네 가마니를 내던 논에는 재작년에 양계장이 들어섰다. 이장네 논에는 젖소가 수 십 마리 들어왔다. 상까지 받았는데 논의 체면이 정말 말이 아니다.

마를 날이 없는 우리 동네 저수지는 20년 전에 만든 것이라 하는데 농사철 끝나면 몸보신 하려고 당시 돈으로 20만원어치나 물고기를 사 넣었다고도 한다. 이제는 물고기 잡을 사람마저 없다. 당신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노인네들이 방죽을 어떻게 오르랴.

눈보라치는 들판에 벌거벗은 채 또는

내가 기뻐하면 세상이 그만큼 기뻐진다고 한다. 내가 웃으면 세상에 웃음꽃 하나 더 해 진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웃음이 만발하면 나도 덩달아 웃음으로 살아가게 되겠지만 싸늘한 시골 들판은 내 마음까지 식어가게 한다. 텅 빈 겨울들판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농부의 겨울은 더 춥다. 세찬 눈보라가 갈기고 지나가는 빈 들판에 맨 살로 떨고 있는 빈 땅들은 농부를 떨게 한다. 우리의 논들이다.

설치미술가 최병수씨가 나락과 생명을 상징하는 솟대를 세우고 있다.
설치미술가 최병수씨가 나락과 생명을 상징하는 솟대를 세우고 있다. ⓒ 전희식
지푸라기 한 가닥 안 남기고 참빗쟁이처럼 박박 긁어 가 버리고 맨 살이 드러나 있다. 땅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과 소 생물, 원생동물들은 농사철 농독에 다 운명하셨다. 그렇다. 농약(藥)이 아니라 농독(毒)이다. 개발독재 정권과 결탁한 책상물림 지식인들은 독을 약이라고 선전했고 관행농법이라는 해괴한 말도 만들어 냈다. 많은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관행농법이라고 따라하고 있다. 얼빠진 노릇이다.

아니다. 화학농법이고 화공농법이다.

위령제를 올려야 할 판이다. 논의 명복을 빌고 애절한 조사(弔辭)를 읊을 때다.

풀꽃상 받고 힘내라 논!

아무리 되풀이 해 농사를 지어도 연작피해가 없는 유일한 것이 논이다. 상을 줄 만하다. 우리나라처럼 아열대성 철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논농사가 최고다. 상 받을 만 하다. 한 여름 뒤뚱거리는 오리들이 벼 포기 사이를 누비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우렁이가 풀씨들을 다 잡아 먹고(으악~ 풀꽃세상 큰 일 났다) 쌀겨로 나락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쌀을 지키자고 100일은 걸은 사람들도 있다. 평생 땅 파먹고 살리라 작정한 어린 학생들도 있다.

이들이 함께 풀꽃상을 받았다. 상이란 으레 공이 큰 사람에게만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구석에 몰려 왕따 당하고 있는 논이 상을 받았다.

힘내라 논. 여어엉 차~

덧붙이는 글 | 풀꽃상은 2003년 11월 9일 아홉번째로 '논'에게 주어졌습니다. 

풀꽃상은 1991년부터 생태적인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매년 자연물에 상을 주어 왔습니다. 그동안 1회 때는 동강의 비오리에게 상을 주었고 2회 때는 보길도의 갯돌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인사동 골목길과 지리산 물봉선도 상을 받았고 재작년과 작년은 새만금 갯벌의 백합과 자전거에 상이 주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유엔은 올해를 세계 쌀의 해로 정하고서 쌀 생산의 침체와 세계적 식량 위기에 대처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 싣는 글은 올 1월 30일 발행 예정인, 위 단체의 기관지인 '풀씨 9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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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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