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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고지는 늦가을에 말립니다.
호박고지는 늦가을에 말립니다. ⓒ 김규환
시골 살림살이는 늘 한 계절을 앞서 시기마다 먹거리를 확보해 둬야 다음 철에 빠트리지 않고 먹어볼 수 있다. 장아찌가 대표적인 음식이다. 이 밖에 무말랭이, 호박쪼가리(호박고지), 토란대와 토란잎, 아주까리 잎, 실가리(시레기), 끝물고추 밀가루 범벅은 가을에 준비한다. 봄, 여름엔 각종 취나물과 가지, 콩잎 등을 마련해 둔다.

보리 파종(播種) 무렵 차가운 냇물에 담가둔 보리가 열흘 남짓 지나자 쏙쏙 싹 틔울 준비를 한다. 건져서 물기를 적당히 빼고 아랫목에 사흘 이리저리 굴리며 뒤집어 주니 파릇파릇 싹이 돋아난다. 널찍한 소쿠리에 담아 널어 말리면 뿌리와 싹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생장을 멈추니 이걸 절구에 빻아 널면 엿기름이다.

단밥 또는 단술이라 했던 식혜(食醯)를 만드는데도 몇 달 전부터 바빠도 짬을 내 재료를 준비해 둔다. 그래야 한 달에 한번 이상 있던 제사를 모시고 시제를 모시고 명절을 쇨 수 있었다.

하시던 베짜던 일을 일시 멈추고...
하시던 베짜던 일을 일시 멈추고... ⓒ 김규환
설을 닷새 앞두고 어머니는 밤낮으로 하시던 길쌈을 잠시 접었다. 대식구가 설을 맞으려면 좀 많은 손이 가던가. 음식량도 무척 많았다. 서울에 올라가 있는지라 셋째인 큰딸을 데리고 할 수도 없다. 그 많은 음식을 결국 혼자서 해야 하는 이유는 그간 만들었던 복조리를 팔러 광주 산수동과 나주 영산포로 떠나신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갓지게(한가로울 때 미리 준비하여 짬짬이 처리함을 이름) 할 수 있는 일은 해둬야 안심이신가 보다. 쌀을 일어 담가두고 엿기름을 눈대중으로 한 되 정도 퍼서 찬물에 담가 빡빡 문지른다. 아침밥을 먹고 시작하여 1시쯤 되니 뽀얗고 맑은 국물만 위에 떠 있다. 식혜 만드는데 활용할 윗물만을 따로 따라 낸다.

생강 한쪽 다듬어 씻어놓고 점심 시간이 지나 시루를 앉혀 밀가루 반죽하여 김이 빠지지 않게 하고는 1시간 넘게 불을 때서 꼬둘밥(고두밥의 된소리와 사투리)을 한다. 꼬둘밥이 다 되자 휘휘 저어 퍼서 식혀 놓는다.

이윽고 아까 미리 받아 둔 엿기름물에 밥을 넣고 저어두고 다시 맹개한(미지근한) 상태로 끓였다가 뚜껑을 덮어 불땐 방 아랫목을 정확히 찾아 동생 엎고 다녔던 포대기로 둘러싸고 솜이불과 거적때기를 덮어 발효를 돕는다.

여섯 시간이 경과 한 밤 일곱 시 무렵 밥알이 동동 뜨자 솥을 깨끗이 씻고는 납작납작하게 썰어둔 생강을 넣고 팔팔 끓이면서 사카린으로 단맛을 맞춘다. 사카린 반 홉이면 설탕 반 봉지에 해당하는 단맛을 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설탕이 대중화되지 못한 탓에 당시에는 몸에 좋지도 않았던 사카린을 주로 썼다.

한 단을 한 저리라 하는데 50개 단위입니다. 동지를 지나 새해가 되어 섣달 그믐날까지 50저리 정도 씩 지고 멀리 나가셨지요.
한 단을 한 저리라 하는데 50개 단위입니다. 동지를 지나 새해가 되어 섣달 그믐날까지 50저리 정도 씩 지고 멀리 나가셨지요. ⓒ 김규환
불 때는 걸 도와드리며 아직 잠을 자지 않고 골똘히 지켜보고 있던 내가 가만있겠는가?

"엄마, 잘 됐는가?"
"그려. 한 그릇 묵어 볼텨?"
"예."
"글면 간 잘 보는 우리 아들이 맛을 봐봐라. 예 있다!"
"후후-. 후루루룩."
"어째 다냐?"
"함은이라우. 너무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으면서 딱 달보드래 하구만요. 거기다가 밥알도 잘 삭아부렀소."
"한 그릇 더 주끄나?"
"됐어라우. 단밥은 살얼음이 얼어야 맛있응께 낼 묵을라요. 그건 그렇고 엄니, 성이랑 누나는 언제 온다요?"
"지난번에 편지에 그믐날이나 온다고 안 하더냐?"
"암시롱(알면서) 물어 본 것이요."
"그만 들어가서 자그라."
"얼른 주무싯쇼잉."
"내는 조청 고고 잘란다."

빻아둔 엿기름
빻아둔 엿기름 ⓒ 김규환
어머니는 내일은 유과를 만들어야 하므로 오늘 조청을 달여 놓고 자야 일머리가 잡힌다는 말씀도 하셨다.

내가 잠든 사이 어머니는 천에 받혀 단물만 받아서 잔불로 다섯 시간 이상 고았다. 아랫목에 발을 묻고 엉덩이와 허리를 지지며 맛난 잠을 자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꿀보다 더 달짝지근하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조청을 한 단지 해 놓으셨다. 먹기 좋게 식어서 약지(藥指)로 한 모금 찍어 먹어봤다. 그걸로 성에 차지 않는다.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가져가니 향긋한 달큼함이 입안에 가득했다.

생강
생강 ⓒ 김규환

조청을 골 때는 약불로 오랜 동안 끓이면 됩니다.
조청을 골 때는 약불로 오랜 동안 끓이면 됩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설 잘 쇠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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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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