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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녹색의 고추는 요즘 우리 집 식탁의 단골 반찬입니다
짙푸른 녹색의 고추는 요즘 우리 집 식탁의 단골 반찬입니다 ⓒ 정철용
어쩌다 초대받아 남의 집을 방문하게 될 때에도 나는 선물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 집 채마밭에서 잘 자란 고추들과 상추와 들깻잎과 고춧잎을 한 움큼씩 따다가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면 그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답니다. 싱싱한 무공해 채소들을 받아든 안주인의 얼굴에는 아이 좋아라, 하는 미소가 피어납니다. 그러니 괜히 선물을 사러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 갈 일이 없지요.

며칠 전에도 이곳 교민 한 분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글들을 보고서 자신이 지은 책을 한 권 보내주고 싶다고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셨지요. 우리 집 주소를 알려드렸더니 정말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책을 잘 받았다는 감사 편지를 써서 이메일로 보내드렸더니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알려주신 주소를 보니 그 분은 오클랜드가 아니라 소다 온천장으로 유명한 테 아로하(Te Aroha)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계시더군요. 오클랜드에서는 자동차로 약 2시간쯤 걸리는 제법 먼 거리이지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때를 민지도 오래되었고 해서 온천도 다녀올 겸 그 분 집도 방문할 겸, 겸사겸사 테 아로하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녀오기 전날, 아내가 내게 말하더군요.

“처음 가는 집인데, 빈손으로 가면 안 되잖아? 뭐 좀 사 가야지?”
“사 가긴 뭘? 그냥 우리 집에서 난 채소들 가져가면 되지. 고추랑 들깻잎이랑 많이 따서 가져가자구.”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게 책까지 보내주셨는데, 그걸로 충분할까? 시골이라 집도 넓어서 그 집에도 채마밭이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 내가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고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아야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내가 정성들여 키운 채소들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며칠 전에 받은, 내 글이 실려 있는 <주간 오마이뉴스>를 한 부 가져가면 정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야채 종합선물 세트(?),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야채 종합선물 세트(?),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 정철용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 분은 우리의 선물을 아주 고마워했습니다. 그 집은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채마밭을 가꾸지 못해서, 우리 집에서 기른 채소들을 가져가길 정말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채마밭에서는 채소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선물들이 자라나고 있는 셈입니다. 채마밭이 아니라 '선물밭'인 것입니다.

사실 정원을 가꾸거나 텃밭을 일구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선물입니다. 인생의 후반기를 정원을 가꾸면서 보낸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세계문학사에 남긴 그 많은 걸작들은 바로 그의 정원이 그에게 준 선물일 것입니다.

198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폴란드의 시인 체슬라브 미와시(Czeslaw Milosz)도 ‘선물’이라는 시에서 그렇게 정원을 돌보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벌새들이 인동 덩굴꽃을 기웃거리는 정원의 풍경 앞에서 ‘나는 세상의 물건은 소유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되고 힘든 정원 일을 하는 중에도 ‘내 육신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허리를 펴보고 바라보는 그의 눈에 푸른 바다와 돛이 보이는 것 역시 그렇게 무욕과 즐거운 마음으로 정원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집 채마밭은 땅과 햇빛이 주는 선물들이 자라고 있는 선물밭입니다
우리집 채마밭은 땅과 햇빛이 주는 선물들이 자라고 있는 선물밭입니다 ⓒ 정철용
아직 그러한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나 역시 채마밭을 가꾸면서 세상의 값비싼 물건들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또한 내 손으로 직접 키운 흙 묻은 채소들을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니, 내 땀과 내 마음이 그 채소들에 담겨 있으니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집 조그마한 채마밭에서 자라는 고추와 상추와 들깨는 땅과 햇빛이 내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듯이, 그것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나의 선물은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값지고 귀한 선물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환산하자면 몇 푼 안 되겠지만, 그 채소들에는 내가 쏟아 부은 시간들과 땀과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이제 설날을 앞두고 선물 준비로 정신이 없겠군요. 그러나 백화점으로, 쇼핑센터로, 슈퍼마켓으로 향하기 전에 잠깐 멈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그런 데 가서 사지 않더라도 정말로 고마운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선물은 없는가를, 사지 않고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 수 있는 선물은 없는가를.

가장 좋은 선물은 돈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선물을 사는데 든 돈의 액수가 아니라 선물에 담은 마음의 깊이와 넓이가 선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 채마밭에서 자라고 있는 자연의 선물은 내게 참된 선물의 의미를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서두의 체슬라브 미와시의 시는 1980년도 문예중앙 겨울호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그의 시선집 <겨울 종소리>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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