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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폭포
구곡폭포 ⓒ 김정봉

강촌하면 떠오르는 낱말들. 젊음, 낭만, 학창 시절, 친구, 자전거, 기차…. 난 이런 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늙은 여행'을 하고 있다. 옆에는 친구 대신 아내가 있고 후배 대신에 아들이 있고 자전거 대신 승용차가 있다. 학창 시절은 먼 과거의 얘기로 추억 속에 맴돌고 있다.

편지, 천국의 계단 촐영지인 경강역에서 본 기찻길, 다음역이 강촌역이다
편지, 천국의 계단 촐영지인 경강역에서 본 기찻길, 다음역이 강촌역이다 ⓒ 김정봉

라면이나 막 끓인 된장국 대신 모래무지 조림이 내 앞에 있고 안주 없이 한잔 기울이던 소주 대신 파전이며 빈대떡과 함께 동동주가 앞에 있다. 별 재미 없는 얘기인데도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헤헤거리던 웃음 대신 아들 앞에 체통이라도 지키려고 하얀 이는 감추고 반 웃음만 짓는 아버지의 웃음만 있다.

사화과학을 공부하며 밤새 토론하던 그런 열기는 식어 가고 날이 어두워지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마음을 죄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구곡폭포(九谷瀑布). 아홉 굽이를 돌아 들어가야 만난다는 구곡폭포. 이름처럼 아홉 굽이를 돌지는 않지만 그다지 깊지 않아 부담을 주지 않는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약간 오르막에 이르면 새끼 폭포가 몇 개 연달아 있고 그 위를 쳐다보면 몇 십 미터가 되는 가파른 얼음 기둥이 솟아 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 ⓒ 김정봉

한 겨울이 되면 전국 전문 산악인이 모여드는 빙벽 등반의 명소이다. 70m에 달하는 빙벽은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아 빙벽 타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몇 명이 모여 빙벽을 타고 있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 ⓒ 김정봉

그들은 빙벽을 찍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희열을 느끼고 빙벽을 찍을 때나는 소리와 느낌이 좋다고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가 나를 즐겁게 한다.

스파이더맨 같다
스파이더맨 같다 ⓒ 김정봉

나는 폭포의 얼음 기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수천 년 동안 결빙과 해빙을 반복하며 그 자리를 지켜 온 폭포를 느낀다. 그리고 얼음 기둥을 지탱해 내기 위해 얼음 기둥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려한다.

문배마을. 구곡폭포 입구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언덕 길이 나있다. 문배마을 가는 길이다. 몇 번이고 꺾인 길을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이르게 되는데 이 길은 걷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재미있다.

문배마을 가는 길
문배마을 가는 길 ⓒ 김정봉

S자 모양의 구불구불한 길모퉁이를 돌 때면, 겸재 정선이 동해안 변에 있는 독벼루라는 절벽을 그린 '옹천'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떠오른다. 비록 나귀의 뒷발은 보이지 않아도 모퉁이를 돌아가면 바로 어떤 길이 전개될까 자못 궁금하게 한다.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의 세부(화인열전1 재촬영)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의 세부(화인열전1 재촬영) ⓒ 역사비평사

설이 되어 어머니가 장에서 설빔을 하나 가득 이고 오던 장면이나 십리 정도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옛일 등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40분 정도 걷다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는다.

고갯마루에 올라선 순간 산 정상 뒤로 펼쳐진 넓은 분지. 고개 너머로 이렇게 넓은 분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만여 평에 이르는 분지엔 10가구 정도의 집들이 흩어져 있다. 그 중 두 가구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문배마을 전경
문배마을 전경 ⓒ 김정봉

고갯마루에서 보는 문배마을이 어떤 이는 한 폭의 풍경화 같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저 평범한 우리 나라 마을 풍경이다. 평범한 마을이어서 더욱 좋다.

문배마을 안내도
문배마을 안내도 ⓒ 김정봉

하지만 요새 여기를 찾는 이가 많아져 그들의 욕구에 맞춰 동동주며 몇 가지 먹거리를 팔고 있어 이제는 평범하지 않은 마을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변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조차 어찌 보면 우리의 욕심일 게다.

아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오르는데 중년 남자 두 분이 여기에 뭐 볼게 있다고 오냐고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다. 구경 삼아 오면 아무 것도 볼 게 없다. 그저 걸으면서 옛 생각도 해보고 문배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춘천에 나가려면 걸었던 길이기에 따라서 걸어보는 것이요, 그저 길이 있기에 걸어보는 것이다. 속으로 나오는 말

'Let me be. 날 내버려둬요, 냅둬요. 그저 내가 좋아서 걷는 거예요.'

어느새 'Let it be'여행이 'Let me be' 여행이 되고 있었다.

문배마을 가는 길. '냅둬요'길로 부르고 싶다
문배마을 가는 길. '냅둬요'길로 부르고 싶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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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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