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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최초의 사진.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찍어 준 것이다.
딸아이의 최초의 사진.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찍어 준 것이다. ⓒ 정철용
어제 1월 13일은 딸아이의 생일이었습니다. 이제 꽉 찬 12살이 되었지요. 작년처럼 올해에도 시원스럽게 바닷가에서 생일 잔치를 열었습니다. 초대받아 온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 옆 잔디밭에서 열심히 보물찾기 놀이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바지를 적셔가며 물 풍선 싸움도 했습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쉴 새 없이 웃어대고 조잘거리는, 한창 여물어 가는 네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이기더군요.

멀리 나무 그늘 밑에 마련된 야외 식탁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딸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정확하게 12년 전의 그 날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산부인과 병원의 수술실 앞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던 내 생애 제일 길었던 그 몇 시간이 말입니다.

제왕절개수술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라서 대개는 1시간 이내에 산모와 아기를 볼 수 있다는데,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간 지 1시간이 넘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불안하다 못해 자꾸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흘렀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겁에 질려 있던 아내의 눈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수술복에 하얀 마스크를 쓴 간호원이 마침내 나오더니 내게 무슨 종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출혈이 좀 심해서 지혈 처리를 했습니다. 이거 수납하고 오세요." 일단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뭐라고 물어보기가 겁이 나서, 산모는 괜찮은지, 아기는 딸인지 아들인지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아기가 작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 실려서 나왔습니다. 딸이라고 간호원이 말해주더군요. 그러나 내 마음은 온통 아내에게만 쏠려 있어서 아기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아기를 잠깐 내게 보여주고는 간호원은 바로 신생아실로 향했습니다.

첫 돌 무렵. 퉁퉁한 땅꼬마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첫 돌 무렵. 퉁퉁한 땅꼬마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 정철용
초조하게 몇 분을 더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아내가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에서 나오더군요. 환자복의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화장기 없는 아내의 얼굴과 부르튼 입술이 너무나도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나를 말없이 쳐다보던 아내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옆으로 흘러 나와 눈가로 흘렀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주었지요. "다 끝났어. 이젠 괜찮아.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내와 함께 회복실 병실로 향하면서 나는 대충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니요? 맞아요.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이렇게 죽을 고생을 했으니 미안할 수밖에요.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사실은 내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출산의 순간에 아내와 함께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달리 겁이 많은 아내가 임신을 하고 산부인과 병원을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신세가 되었을 때 나는 약속했지요. 내가 옆에 있으면 그래도 조금 덜 무서울 테니, 아기 낳을 때 나도 옆에 있을게, 라고요.

그게 한국에서, 더군다나 10년도 전인 그 시절에 가능한 약속이었냐고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라마즈 분만법 강좌를 수강한 경우에는 남편이 출산의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있었지요. 운 좋게도 아내가 다닌 그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바로 그 라마즈 분만법 강좌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수강 등록을 했고 1주일에 한 번씩 부부가 함께 라마즈 분만법 강좌를 들으면서 호흡법, 이완법, 연상법을 연습했습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더 불러오고 예정된 날짜가 다가왔지만 우리는 라마즈 분만법이라는 비책이 있었기에 출산의 그 순간이 두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지요. 아니, 최소한의 고통을 느끼며 생명 탄생의 순간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다는데, 어찌 출산의 순간이 두렵게만 느껴지겠습니까!

놀이방에 다니던 네 살 무렵. 티없는 웃음에 드러나는 하얀 이가 예쁘다
놀이방에 다니던 네 살 무렵. 티없는 웃음에 드러나는 하얀 이가 예쁘다 ⓒ 정철용
우리는 주변에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혹자는 라마즈 분만법의 효과에 대해서 미심쩍어 했고, 또 혹자는 정도가 지나친 남편의 자상함은 공처가로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틈만 나면 열심히 호흡법을 연습함으로써 그 순간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였습니다. 예정일을 한 달 정도 앞둔 정기 검진에서 태아가 정상 위치와는 반대로, 즉 머리가 위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별 이상이 없고 귀찮아서 한 달 전의 정기 검진을 건너뛰었던 자신의 불찰을 책망했습니다.

태아가 정상 위치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집에서 운동을 해보았지만 이미 늦어서 태아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결국 함께 출산의 기쁨을 나누려던 우리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제왕절개수술 날짜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마취된 채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산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그것도 아내 혼자서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실망했고 아내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내는 제왕절개수술로 딸아이를 낳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수술 후 경과가 좋지 않아서 남들은 3일이면, 아무리 늦어도 5일이면 퇴원할 것을 7일째에야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아내의 말로는 수술 후 의식이 깨어났을 때, 느낌이 안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그제야 출혈이 아직도 멈추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지혈 처리를 다시 해 주었다는군요.

그래서 지금도 아내는 빈혈기가 제법 심합니다. 딸아이가 뱃속에서 제대로만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래서 자연분만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요, 소용없는 일이지요.

공들여 배우고 연습한 라마즈 분만법을 사용해 보지도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더 아쉬운 것은 우리의 딸이 세상에 나오는 탄생의 순간을 아내나 나나 모두 놓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혼자 수술대에 오르면서 아내가 느꼈을 공포도 덜어 주고 수술 끝난 후의 심한 출혈도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중학생이 된 딸아이. 요즘은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쓴다.
중학생이 된 딸아이. 요즘은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쓴다. ⓒ 정철용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부부가 모두 원할 경우에는, 출산의 자리에 남편이 함께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 아이인데도 분만실 입장이 허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의 동생이 태어나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정도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연분만을 할 때, 부부가 모두 원할 경우 남편도 함께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살아갈수록 아이 키우기는 엄마나 아빠 어느 한 쪽의 몫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깃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이유가 되었든 간에 딸아이의 출산의 순간에 함께 있지 못했던 나는 아내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미안함을 나는 지난 12년 동안 갚아 왔지만, 정원 일을 하다가도 가끔씩 어지러워하는 아내를 보면 두고두고 갚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딸아이의 생일날을 맞아 나는 다시 아내에게 말합니다.

"그 때 함께 있지 못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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