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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이제 석달 앞으로 다가온 제17대 총선의 열기가 벌써부터 뜨거운 모양이다. 이번에는 정말 새판이 짜여질 것인가. 해외에 나와 사니 한국에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정치 관련 기사에 자주 눈길이 간다.

그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끈 기사는 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여성들이여, '차떼기 정치' 깨뜨리자'는 제하의 기사였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이곳으로 이민 와서 1년 반만에 경험했던 뉴질랜드 총선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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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차떼기 정치' 깨뜨리자

한국에서 월드컵 4강 신화의 후폭풍이 아직도 거리를 휩쓸고 다니던 지난 2002년 7월 27일에 뉴질랜드에서는 총선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도 거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몇 차례 열린 정당 대표들의 TV 토론과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광고가 없었다면 과연 총선을 앞두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이민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뉴질랜드의 총선 풍경은 선거일 몇 달 전부터 신문의 지면을 온통 도배할 정도로 시끄럽고 요란스럽고 뻑적지근한 한국의 총선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선거 결과였다. 선출된 국회의원 총 120명 중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34명이나 되다니!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답게 뉴질랜드에서는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당시 총선에서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은 제1야당인 국민당에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함으로써 재집권에 성공했다. 동시에 노동당의 당수인 헬렌 클락(Helen Clark)은 뉴질랜드 역사상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 수상으로 기록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뉴질랜드인들은 다시 '여인천하(女人天下)'를 선택한 것이었다.

헬렌 클락이 이렇게 축배를 들고 있던 때, 태평양 바다 건너 한국에서는 한 여성이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2002년 7월 31일, 장상 총리의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됨으로써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 탄생이라는 꿈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인사 청문회에서 드러난 고위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신뢰성의 결여가 그녀를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린 결정타였다.

물론 장상 총리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성차별적인 시각보다는 그녀의 개인적 자질과 도덕성 시비가 결정적이긴 했다. 하지만 며칠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이 두 여성의 엇갈린 희비는 뉴질랜드와 한국에서의 여성의 초상이 얼마나 다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처럼 느껴졌다.

한국과는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헬렌 클락 수상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여성이다. 뉴질랜드 최초의 여성 수상이며 국민당의 당수를 지냈던 제니 쉬플리(Jenny Shipley), 현재 녹색당의 공동 대표직을 맡고 있는 쟈네트 피츠시몬즈(Jeanette Fitzsimons), 그리고 현재 뉴질랜드의 총독인 실비아 카트라이트(Dame Silvia Cartwright)를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

또한 헬렌 클락이 집권 후 새로 조각한 행정부의 각료 28명 중에서도 여성이 8명이나 된다. 비율로 보자면 약 30%의 의석과 장관직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의 시장(市長)을 비롯한 많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여성이다.

이에 비할 때, 현재 총 273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단지 5.9%인 16명만이, 그리고 22개 부처 장관 중에서는 고작 4명만이 여성인 한국의 정치계는 가히 남성들의 독무대라 할 만하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여성 총리는 난망(難望)이요, 여성 대통령은 거의 무망(無望)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가부장적 유교 문화를 내면화시켜 온 한국 사회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려는 여성을 용인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나 정치 분야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여성들에 대한 문턱이 높아서 한국에서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더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최근에 이런 여성들의 좌절감을 딛고 일어서서 '여성 100인 국회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의 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위기의 부패 정치를 개혁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청렴도 지수를 살펴보더라도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예컨대, 국회 의석의 30% 이상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 뉴질랜드가 늘 빠지지 않고 부패 없는 나라의 5위권에 안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이룬 결실인 것이다.

그러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하지 말라. '여인천하' 뉴질랜드처럼 암탉이 울어야 돌아가는 나라가 있고, 또 그런 나라일수록 깨끗하고 부패 없는 정치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선거를 치렀다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걱정 반 쪽으로 기울곤 했던 것이 올해 제17대 총선에서는 조금 달라질 것인가. 100인이 아니라 그 절반만이라도 여성들이 국회에 진출한다면 걱정 반은 기대 반 쪽으로 기울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번 제17대 총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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