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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

주말저녁 등산 준비를 합니다. 물과 귤 몇 개를 배낭 속에 집어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요즘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해서 보름 전에 꽃망울 송이송이 맺히며 동장군의 기세만 살피고 있던 매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보러가기 위해 일찍 잠이든 것입니다.

동트기 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로 달려 갑니다. 선암사로 올라가는 호적한 비포장 길에 발가벗고 서있는 나무들은 시린 밤을 뒤로 하고 찬란한 해를 맞이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따스하게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깐닥깐닥 산사로 걸어 들어갑니다.

승선교(보물 400호)에 다다랐을 즈음 작업복 차림의 40대 아줌마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한잔을 들고 헛기침을 해대며 승선교 공사장 쪽으로 걸어갑니다. 붕괴위험이 있어 지금 승선교는 해체복원 공사가 한참 진행 중입니다.

▲ 선암사 매화
ⓒ 김도수

선암사를 찾아올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맞물리며 옥계수 위에 무지개를 피워주며 우리들에게 늘 기쁨을 주던 무지개 다리도 세월의 무게가 너무 힘겨웠던지 잠시 각자 편한 대로 이리저리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며 지탱해온 세월의 무게를 탈탈 털어내고 편하게 대지 위에 누운 돌들은 이 겨울이 정말 꿀맛 같은 휴식기간입니다. 흩어져 있는 돌들을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틈 벌어지게 하는 일들은 없었는지 뒤돌아 보게 됩니다.

선암사 입구에 다다르니 찾아오는 중생들, 걸음걸음 사뿐이 내딛고 가라며 싸리비로 깨끗이 쓸어놓은 길, 발자국 남기기가 너무 아까워 나는 갓길로 발길을 옮깁니다. 나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싸리비로 쓸어놓은 길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대해왔는지 반성을 하며 길을 걷습니다.

찾아온 이 아무도 없는 절은 정말 조용하기만 합니다. 간혹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만이 바람소리에 '땡끄랑 땡그랑' 소리만 낼 뿐입니다. 청아한 풍경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으니 일상에 찌든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샘물처럼 기쁨이 마구 솟구칩니다.

밤낮을 눈을 감지 않고 사는 물고기들처럼 모든 일에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며 살라는 경각의 울림소리가 계속 '땡끄랑 땡그랑' 들려옵니다.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 선암사 매화
ⓒ 김도수

볼일이 급해 뒷간으로 가는데 등 굽은 소나무가 내 발길을 붙잡습니다. 엎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희망을 안고 살라는, 낮으면 낮은 데로 사는 방식을 터득하라는 외침을 듣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삶이 되도록 마음 속 깊이 다짐을 해봅니다.

뒷간에 갑니다. 'ㅅ간뒤'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글 읽는 습관이 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들여져 있는 우리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볼 줄을 모릅니다. '뭔 뜻을 저렇게 새겨 놓았지…'하며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일쑵니다. '뒤깐'을 꺼꾸로 써놓은 것입니다.

뒷간에 들어가 세상 잡다한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볼일을 봅니다. 일상의 잡다한 군더더기들이 낙하를 하며 풍덩풍덩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갑니다. 오늘도 넣어주고 내려주는 일에 아무 이상이 없는 나는 행복한 하루를 뒷간에서 맞이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뒷간을 나오니 산사는 더욱 고요하고 새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옵니다. 새들이 지저귀는 산길을 따라 보름 전에 매화꽃 몽우리 맺혀있던 모습을 보았던 곳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수백 년 묵은 매화를 보러 가는 길은 아닙니다. 늙은 매화나무에 꽃망울 맺히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젊은 매화나무 두 그루가 동장군이 찾아오지 않는 틈을 타 언제 꽃망울 터트리려 볼까 날짜를 저울질 하고 있어 찾아가는 길입니다.

▲ 조계산 정상 등산길
ⓒ 김도수

한걸음 한걸음 산길을 걸으며 매화나무 있는 곳에 다다르니 매화꽃이 곱게 피어 나를 반깁니다. 옷깃을 파고드는 시린 겨울을 뚫고 매화향기는 내 코를 자극합니다. 나는 이내 매화꽃에 코를 바짝 들이대며 매화향기에 취해봅니다. 봄, 봄은 아직 멀었지만, 봄 기운이 서서히 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혹한이 몰아치는 어둔 날밤을 지새우던 매화는 매서운 바람을 뚫고 꽃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매화꽃을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꽃의 화신(花信)처럼 늘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조계산 정산 장군봉에 올라가 내 발 아래로 펼쳐진 대 자연을 바라 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낮은 곳에 있는 사물들이 한 눈에 잘 들어 옵니다. 내 발 아래 옹기종기 붙어사는 미물들이 행복의 조각들을 서로 골고루 나눠먹으며 하루하루가 행복해지길 빌어봅니다.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에서 비교적 평탄한 산봉우리 등산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무척 힘이 들지만 한번 정상에 올라 걷는 길은 힘들이지 않고도 잘 걸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는 일도 등산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장군봉 반대 쪽에 우뚝 솟아 있는 연산봉으로 올라갑니다. 연산봉에 올라 내가 머물렀던 장군봉을 바라보니 아득한 거리입니다. 어떻게 저 먼 거리를 걸어왔는지 나를 데려다 준 두 다리가 고마워 한참 동안 주물러 줍니다.

▲ 연산봉에서 본 장군봉
ⓒ 김도수

연산봉 정상에서 김밥과 귤 몇 개를 먹고 다시 산을 내려옵니다. 낮게 더 낮게 내 일상이 숨쉬는 쉼터로 내려와 우뚝 솟은 장군봉을 다시 쳐다봅니다. 고개를 쳐들며 바라는 장군봉은 너무 높게만 보여 나는 다시 작은 모래알이 되어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환원합니다.

정상에서 내 발 아래에 있던 미물들을 바라보며 눈으로나마 잠시 세상을 호령하던 생각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온 나는, 내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혹 옹이가 되어 마음의 상처를 입히며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올 한해 동안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과 기쁨을 전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에 함께 송고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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