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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동정 없는 세상>
책 <동정 없는 세상> ⓒ 문학동네
- 한번 하자.
- 싫어.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은 남자 주인공의 '한번 하자'로 시작하여 '한번 하자'로 끝이 난다. 이 우스운 결말 구조는 이 책의 주인공이 어떻게 하면 여자친구랑 한번 자볼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한 수능 직후의 청소년이라는 데에서 비롯한다.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을 성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19세의 청소년으로 설정하고 그의 일상사와 생각들을 통해 재치 있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성적 호기심과 환상으로 가득 찬 10대들의 모습이지만 가벼움 속에 그들의 성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문학의 가치가 있다.

이 사회가 지닌 모순과 병폐를 무겁지 않은 문체로 전달한다는 점 또한 이 책의 문학성을 높이는 요소다. 작가는 입시로 압박 받는 아이들, 음란물에 노출되어 성적 환타지 속에 살아가는 청소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솔직한 묘사 속에 우리 사회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온갖 고민과 방황이 녹아 있다.

- 어제 수능 잘들 봤나?
사방에서 우우, 하는 야유 소리며, 망쳤어요, 하는 대답이며 심지어 *됐어요, 하는 고함 소리마저도 거리낌 없이 터져 나왔다. 겨우 조용해졌던 교실이 들끓기 시작했다. 다시 분위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 담임은 출석부가 부서질 정도로 세게 교탁을 내리쳤다. 하긴 부서진다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수능도 끝났고 남은 출석일수는 대충 메워질테니 말이다.


이 아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억압의 실체는 대학을 가야한다는 부담감과 성적인 억눌림이다. 성이 금기시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음란물을 공유하며 억압된 성의 탈출구를 찾는다.

내게 최초로 살아 있는 성교육을 해준 사람은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창수였다. (중략)
- 우와, 저게 뭐냐. 끝내준다.
한 녀석이 탄성을 질렀다. 녀석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치 전에도 봤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지만 내내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문화 비디오'를 통해 최초의 성교육을 받은 주인공은 그 날 이후 일주일 동안 지나가는 여자들의 특정 부위만 유심히 보게 되고, 눈앞에 비디오에서 본 영상들이 어른거리는 증상을 얻는다.

그 후 고등학교에서 온갖 잡다한 성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주인공 준호는 마스터베이션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신체 건강하고 지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고등학생들은 가끔 그런 생산적인 토론을 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동영상 파일을 나누어 가지면서 '남자들만의 우정'을 돈독히 한다. 이처럼 내공으로 잘 다져진 성적인 훈련들은 이제 '실전'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일만 남았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미아리 등지에서 성적 분출구를 찾기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준호. 그래서 그는 여자친구 서영이에게 '한번 하자'고 꼬드긴다. 하지만 서영이는 끄떡도 않는다.

준호의 이와 같은 엉뚱한 공상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시대 청소년들의 생각은 현 10대들의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컴퓨터 안에는 엄청난 양의 포르노 파일들이 들어 있었다. 서영이가 왔다간 날 죄다 지워버렸다. 이제 곧 실전으로 들어갈 텐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순수한 일념에서였다.

사실 컴퓨터 안에 있는 포르노 파일들을 지워버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파일을 지워버리는 것, 혹은 인터넷의 섹스 사이트를 돌아다니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은 흡사 담배를 끊는 것하고 비슷하다. 이제는 섹스 사이트에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쩌다 보면 모니터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서영이는 좀더 지적인 이야기를 하며 사랑이라는 걸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이 책에 나오는 남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성을 스스로 학습한 아이들이다. 준호 또한 그 학습이 자신을 성숙한 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학습한 준호의 성적 환상은 결국 진짜 서영이랑 자는 것으로 완벽히 깨진다.

"아무것도 없었다. 끓어오르는 열정과 쾌락과 신음과 교성과 열락과 기쁨은 모두 포르노 안의 것이었다. 내 몫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적막과 씁쓸함과 외로움과 허전함이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섹스란 이런 것이었구나. 여자를 알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구나.

어른?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른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어른이라고? 달라진 것이라고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씁쓸함과 허탈감을 맛보았다는 것뿐인데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단 말인가. 고작해야 이 정도인 것이었구나."


여자와 한번 자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믿고 있었던 준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경험한 주인공은 진정 성숙한 자세로 사랑과 삶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를 찾고, 여자 친구 서영이에게도 좀더 책임감 있는 모습과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모습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내적인 성장을 이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한 청소년의 모습을 통해 '자아의 성장'이란 화두를 적절히 끄집어 내었다. 그 성장의 과정과 모습이 조금은 가볍고 우습긴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애정은 간과할 수 없는 이 책의 가치일 것이다.

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문학동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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