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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폭격으로 인해 300여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충북 단양의 곡계굴 입구(사진 왼쪽)과 내부 모습. 당시 생존자들에 따르면 굴 안쪽은 현재보다는 더욱 넓고, 연못이 있는 등 큰 규모였다고 증언했다. 사건 이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여름에 불어난 물과 흙, 돌 등으로 내부가 비좁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 폭격으로 인해 300여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충북 단양의 곡계굴 입구(사진 왼쪽)과 내부 모습. 당시 생존자들에 따르면 굴 안쪽은 현재보다는 더욱 넓고, 연못이 있는 등 큰 규모였다고 증언했다. 사건 이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여름에 불어난 물과 흙, 돌 등으로 내부가 비좁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홍철

'드드득… 드드득, 퍼~엉… 펑!'

'쌩~'하니 날아온 '미군' 비행기 4대에서 쏟아대던 기관총 사격이 일제히 멈췄다. 폭격이 시작된지 30분 후 그들은 총구를 거두고 꽁무니를 뺐다. 하지만 단 30분 동안 피난민 수백명 이상의 생목숨이 생사를 달리해야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51년 1월 20일 1·4 후퇴 이후 전쟁이 최고조를 달리던 그 순간,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곡계굴(속칭 괵개굴)에는 400여명의 피난민이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2리에 살고 있던 한양 '조'씨 60세대 150여명을 비롯해 영춘면과 강원도 평창·정선·영월 등에서 피난 온 난민 250~300여명 등이었다.

피난민 400여명이 머물던 곡계굴의 참극

전쟁이 엄습해오던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고 비좁은 동굴에서 생활은 전쟁의 고통을 더욱 실감케 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곁에 있어 그나마 마음은 녹일 수 있었다.

피난 생활도 일상이 될 무렵, 곡계굴 피난민들의 일상을 깨뜨리는 참극이 빚어졌다. 곡계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기적적으로 생존한 조병우(61. 상2리. 당시 9세)씨의 증언은 이렇다.

"그날 아침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어요. 동굴 안쪽 맨 끝에 고모님 가족이 있었는데, 고모님이 '너네 가족한테 가라'면서 혼구녕을 내길래 동굴 입구쪽으로 나오고 있는데, 글쎄 동굴 입구 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난리가 났어요. 어른들 손에 이끌려 동굴을 나오는데 비행기에서 총질을 하고 있지 않아요. 이리저리 피해서 다행히 동굴 앞에 있던 도랑으로 몸을 피했죠."

"총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고, 연기에 질식해 죽고..."

몸을 피한 도랑에서 9살 병우는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해야했다.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늘엔 미군 비행기 4대가 날고 있었어요. 동굴 입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한테 쉬지 않고 총질을 하고 있었고 드럼통(소이탄) 같은 걸 떨어뜨리더니 '펑'하고 터지면 불길이 치솟았어요. 그러면 새까만 연기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요. 결국 안쪽에 있던 피난민이 또 뛰어나오면 총알세례가 기다리고. 누군 불에 타 죽고, 총 맞아 죽고, 연기에 질식해 죽고 난리도 아니었지…."

'곡계굴 미군 폭격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의 정확한 피해자 인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략적인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현재까지 증언들에 따르면 동굴안에 있던 피난민은 대략 400여명으로 추정되고 이중 살아남은 생존자는 부상자를 포함해 30~40여명 뿐이다.

생존자들도 당시 부상과 충격으로 이내 사망한 경우가 많다. 당시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조카 등을 잃었던 조봉원(70. 현재 충북 제천 거주)씨는 "여동생이 불에 팔하고 다리가 타 버렸고 몸뚱이만 남은채 발견됐다"면서 "여동생은 밤새 초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노래를 미친듯이 부르다가 죽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조봉원씨는 또 "가족을 잃은 후 자식의 참혹한 시신을 본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이내 세상을 등졌다"고 말했다.

곡계굴 학살로 인한 피해 규모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이유는 일가족들이 단시간에 전원이 몰살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400여 피난민 중 생존자는 30여명 뿐 "단시간에 벌어진 최대 학살"

2~3일간 정찰 후 폭격
민간인 구분 안됐나?

'곡계굴 미군 폭격 학살'은 여타의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벌어진 사건처럼 그 배경과 오폭 가능성에 대한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곡계굴 폭격 당시 생존자 조병우씨는 "사고가 발생하기 2~3일전부터 미군 정찰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당일날도 폭격에 앞서 정찰 비행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즉 미군은 정찰기를 동원해 2~3일전부터 곡계굴 주변의 동태를 살핀 후 1월 20일 오전 미군기 4대를 동원해 '소탕 작전'을 벌인 것이다.

정찰기를 동원한 꼼꼼한 정찰을 통해서도 민간인인지,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은 의혹으로 남는다.
그동안 곡계굴 미군폭격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익형씨는 "곡계굴 학살은 단 시간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외지에서 온 피난민 일가족이 몰살 당한 경우가 많아 피해 정도의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또 "학살장소가 어둡고 비좁은 동굴이라는 특성상 사망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학살이 벌어진 직후 시신수습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영춘면사무소가 소실돼 호적 등 당시 영춘면 일대 주민들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미비하다는 점도 피해정도 파악의 어렵게 하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이 빚어진 직후 일가족이 그나마 한명이라도 살아남아 있어야 죽음의 확인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습된 시신보다 훨씬 많은 버져린 시신들은 50여년 세월의 깊이에 고스란히 묻혀랴 했다.

폭격 당시 참혹한 공포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던 마을주민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곡계굴 근처로의 왕래도 자제하고 있었다. 단지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이들이 굴안으로 찬 물길을 따라 시신 일부가 흘러나오거나, 마을 개들이 물어오는 유골 일부를 보면서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지난 3일 53주기 곡계골 희생자 위령제가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곡계굴 입구에서 유족 등 1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규명과 국가적 차원에서 희생자를 위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3일 53주기 곡계골 희생자 위령제가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곡계굴 입구에서 유족 등 1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규명과 국가적 차원에서 희생자를 위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정홍철
지난 99년부터 곡계굴 대책위원회(위원장 조태원)가 구성돼 활동하면서 곡계굴 학살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지난 1월 3일 오전 10시 30분 곡계굴 입구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추모 53주기 '곡계굴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이날 위령제에는 곡계굴 희생자 유족들과 이건표 단양군수, 송광호(충북 제천·단양) 의원, 그리고 관련 단체 관계자 등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건표 단양 군수는 "곡계굴은 우리 현대사의 비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산 교훈장"이라며 "그 날의 기억을 상기하여 다시는 이땅에 그와 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말했다.

이어 송광호 의원은 "1951년 1월 단양 곡계굴 집단희생 사건은 한국 전쟁 중에 있었던 가장 참담한 민간인 희생사건이었다"며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민간인들이 어처구니 없이 아군인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희생 되었다"고 말했다.

올해로 두번째 위령제 열려... 이제 국가의 몫

ⓒ 정홍철
송 의원은 "있을 수도 없고 두 번 다시 있어서도 안 되는 이런 집단희생 사건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명백히 드러내야 한다"며 "이를 통해 국가는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지 못한 자기의 과거 잘못을 철저히 반성해야 하며 또한 그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라며 특별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현재 곡계굴에서 희생된 유족들도 최근 국회 본의회 의결 등을 남겨두고 있는 특별법(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한 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수백명의 이름없는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위로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유족 조병우씨는 "사건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10여명이 채 안된다"면서 "국가차원에서 위령제를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위령탑 건립 등 사건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씨는 "그들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않고서는 영혼을 달래 수 없다"면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제는 더이상 곡계골(哭溪堀)의 '통곡'을 방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유족들의 바람이다.

지난 3일 열린 곡계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피해자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지난 3일 열린 곡계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피해자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 정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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