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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제왕> 1편은 '산타 원정대'가 도착하는 산타 퍼레이드다.
<크리스마스의 제왕> 1편은 '산타 원정대'가 도착하는 산타 퍼레이드다. ⓒ 정철용
무척이나 일찍 시작되는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시즌의 선두에 나서는 <크리스마스의 제왕> 1편은 11월 중순에서 12월 초에 걸쳐 각 도시별로, 또 같은 도시 내에서도 지역별로 제각기 열리는 산타 퍼레이드다. 시민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도착하는 '산타 원정대'와 함께 뉴질랜드의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된다.

이어서 12월 초ㆍ중순에 각 도시의 넓은 시민 공원에서 개최되는 야외 음악회는 2편에 해당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두 도시' 즉, 크라이스트처치와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코카콜라 크리스마스 인 더 파크'라는 이름의 야외 음악회다. 2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의 제왕> 2편은 야외 음악회인데, 크라이스트처치와 오클랜드 '두 도시'에서 열리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크리스마스의 제왕> 2편은 야외 음악회인데, 크라이스트처치와 오클랜드 '두 도시'에서 열리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 정철용
이미 지난번 기사에서 썼던 것처럼, 크리스마스를 비교적 멀리 앞둔 시점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행사인 산타 퍼레이드와 야외 음악회의 주인공은 산타 클로스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좀 더 가까워진 시점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의 제왕> 3편으로 넘어가면 주인공이 바뀐다.

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제왕'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아기 예수님이시다. 영화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제왕> 3부작도 3편에 가서야 '왕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촛불 밝히고 부르는 캐럴(Carols by Candlelight)'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3편에 등장하는 아기 예수님은 산타 클로스처럼 실제로 얼굴을 내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둠 속에 환히 불 밝힌 촛불을 들고 함께 부르는 캐럴 속에서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느낄 수 있기에 3편에서는 정말 우리의 마음이 경건해진다. 이런 점에서 3편은 <크리스마스의 제왕> 3부작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긴 하지만 가장 크리스마스다운 행사라 할 것이다.

이 행사 역시 지역별로 개최되는데, 내가 사는 오클랜드 동부 지역에서는 지난 일요일 밤에 열렸다.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설 때만 해도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가 내리지 않더니 막상 저녁을 다 먹고 행사장에 도착할 때쯤 되니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한다.

차를 주차시키고 트렁크를 열었는데 아뿔싸, 우산이 없다.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뉴질랜드에 와서 오늘 처음으로 참여하는 행사인데 어쩔 것인가. 양초 세 자루까지 준비해 왔으니 비를 조금 맞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보고 가기로 한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한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또 다른 손에는 깔개로 쓸 큰 타월이나 비닐 등을 들고 있다. 더러는 야외용 접는 의자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크리스마스의 제왕> 3편은 촛불 밝히고 캐럴을 함께 부르는 행사이다. 진정한 '왕의 귀환'은 이때 이루어진다.
<크리스마스의 제왕> 3편은 촛불 밝히고 캐럴을 함께 부르는 행사이다. 진정한 '왕의 귀환'은 이때 이루어진다. ⓒ 정철용
언덕 위 잔디밭과 그 주변의 나무 아래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자리 잡은 가운데 브라스 밴드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연주하면서 행사가 시작된다. 그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함께 캐럴을 부른다. 우리도 미리 나눠 준 프로그램 책자에 인쇄된 영문 가사를 보면서 따라 부른다.

내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마지막으로 불러본 적이 언제였던가?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아서 그 동안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지낸 적이 없는 우리 가족은 이렇게 함께 캐럴을 불러 본 기억이 없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거리에서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캐럴을 들으며 가끔 흥얼거리기만 했을 뿐 목청껏 불러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여기 뉴질랜드에 와서 이렇게 아내와 딸과 함께 캐럴을 부르게 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캐럴을 부르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그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어릴 때 빼놓고는 한국말로도 별로 부른 적 없는 캐럴을 어둠 속에서 그것도 영어로 부르자니 자꾸 박자를 놓치게 된다. 영어 가사에 오히려 익숙한 딸아이는 자꾸 틀리는 엄마와 아빠에게 핀잔을 준다. 유일하게 틀리지 않는 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이 캐럴은 영어 가사도 익숙해서 나와 아내는 박자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부른다.

이렇게 캐럴을 부르며 무대 뒤쪽의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나무에 걸어 놓은 꼬마 전구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린다. 시내에 세운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오히려 이 자연스럽고 소박한 나무가 더 좋아 보인다.

촛불 밝혀들고 캐럴을 함께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촛불처럼 따스한 나눔의 마음과 평화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있다.
촛불 밝혀들고 캐럴을 함께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촛불처럼 따스한 나눔의 마음과 평화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있다. ⓒ 정철용
어둠이 짙어지자 사람들은 가지고 온 촛불들을 하나씩 밝혀들기 시작한다. 우리도 준비해 온 양초를 꺼내 불을 붙인다. 자꾸 꺼진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조금 불어서 여간해서 불을 붙이기 힘들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촛불을 밝혀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플라스틱 통으로 촛불을 감싸고 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고 플라스틱 통으로 바람을 가리고 있으니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 불빛에 의지해 캐럴의 가사를 보면서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툴게 준비해 온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촛불을 밝혀들고 캐럴을 부르고 있는데,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촛불도 밝히지 못하고 있자니 민망스럽기조차 하다.

크리스마스를 맞는 즐거움과 아기 예수를 맞이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기보다는 보고 즐기자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이렇게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임을 나는 깨닫는다. 결국 내년을 기약하며 우리 가족은 한 시간 정도 있다가 행사장을 떠났다. 그렇게 굵은 빗방울은 아니었지만 옷이 제법 젖었고 어둠이 짙어지면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혀들고 한 목소리로 캐럴을 부르며 맞이한 <크리스마스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은 내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질리도록 들어온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진부한 구절이 그대로 내 가슴에 새겨졌으니 말이다.

행사장을 나오면서 뒤돌아보니, 그 말처럼 평화 가득한 지구촌이 되기를 기원하는 수많은 촛불들이 간절한 소망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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