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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한시산책>
<김용택의 한시산책>
"나무와 풀과 빛과 바람과 꽃과 새와 해, 그리고 달과 강과 산으로 인생과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우리 옛시 속으로 나는 오랫동안 산책했다. 사람과 자연의 그 무구한 교감의 숨결이 나를 달 뜬 강가로 불러내어 서성거리게 한다. 달빛 아래 강물은 얼마나 황홀하게 반짝이고, 달 뜬 산은 얼마나 적막하게 검푸른가"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김용택(55). 그도 한때 시인이 되기 위해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를 보내놓고 속앓이를 했다. 그리고 번번이 미역국을 먹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섬진강>이란 시를 들고 신춘문예란 우물을 빠져나와 드넓은 시의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김용택 '섬진강.1' 모두)


섬진강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그때부터 문단에서 이름깨나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김용택'이란 이름 석 자만 들먹여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가 태어난 외딴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덕치초등학교에서 섬진강물처럼 맑은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촌놈이다.

"이 작은 '시의 집'을 지어본 것은, 한시가 우리들의 생활과 거리가 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나는 한문을 깊이 해석하고 번역할 만큼 조예가 깊지 않다. 한글로 번역된 한시들을 내 식대로 읽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본문을 옆에 새겨두었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10년 동안 읽고 모은 한시에 짤막한 글을 덧붙힌 우리 옛시 이야기 <김용택의 한시산책>(화니북스)을 펴냈다. 모두 2권으로 묶인 이번 시집에는 황진이, 정약용 등을 비롯한 우리 옛 시인들의 시 100편이 사랑, 자연, 청빈(가난), 인생이란 네 가지 주제로 실려 있다.

누가 곤륜산의 옥을 쪼개
직녀의 빗을 만들었나요
견우 도령과 이별한 뒤에
슬퍼서 하늘에 버린 거라오

(황진이 '반달' 모두)


제1부 <사랑>편에 실려 있는 황진이의 시를 읽은 시인은 마치 곁에 황진이가 서 있기라도 하듯이 이렇게 속살거린다. "누님! 무엇을 던져버리고 싶었습니까? 이까짓 사랑, 이까짓 남자, 이까짓 시, 아니면 이 덧없는 생, 오! 누님. 견우와 헤어진 뒤 던져버린 것이 반달이라는 누님의 그 표현."

그렇다. 김용택은 우리의 옛시를 대충대충 읽지 않는다. 시대와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황진이에게 다가가 "오늘 밤 반달에 누님의 도도했을 얼굴 걸렸습니다"라며 장난을 치고 농을 건다. 그리고 싸가지 없다고 황진이가 호되게 꾸짖으면 꼼짝 못하고 당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

산은 뾰쪽뾰쪽 물은 찰랑찰랑
바람은 솔솔 꽃은 도란도란
도인의 삶이 바로 이와 같으니
어찌 구구히 세상일을 따르리

(지엄 스님 '도인의 삶이' 모두)


아무렇게나 골라본 제2부 <자연>에 실려 있는 이 시에서 김용택은 넌지시 지엄 스님의 허리를 찌른다. 그리고 "자연을 형태의 소리로 표현했군요. 뾰쪽뾰쪽, 찰랑찰랑, 솔솔, 도란도란 표현이 재미 있군요. 도인의 삶이 바로 그와 같답니다. 그렇지요"라며 슬쩍 넘겨짚기까지 한다.

넘겨짚기? 그렇다. "도인의 삶이 바로 그와 같"다고 말 할 수 있는 자 대체 누구이겠는가. 그 또한 도인이 아니라면 어찌 도인의 삶이 그러하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래. 그래서 시인 또한 구구한 세상일을 따르지 않고 외딴 촌구석에 들어앉아 아무리 바라보아도 지겹지 않은 섬진강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 아래 외딴 집은 누구의 집일까
굴뚝에선 가느다란 연기 피어오르고
무너진 울타리 옆에서는 개 짖는 소리
불씨 꾸러 온 사람이 문이라도 두드리나

(이제현 '굴뚝 연기' 모두)


제3부 <청빈>(가난)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읽은 시인은 걱정부터 앞선다. "불씨를 꾸러 간다는 말, 젊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거라며, 자신의 어릴 적 향수에 젖는다. 그리고 "불씨"는 "화로 속에 든 불잉걸을 집으로 들고 오거나, 부엌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 요즈음 사람들은 '불씨를 꾸러 간다'는 말뿐만 아니라 '군불을 뗀다'라는 말도 잘 모를 것이다. 땡겨울, 매캐한 연기를 마시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궁이 깊숙히 불을 지펴 아랫목을 절절 끓게 하던 그 '군불'. 하긴, 가스 보일러나 기름 보일러로 방을 데우는 요즈음 사람들이 어찌 '군불'을 알 수가 있겠는가.

짚으로 살을 대신하고 새끼로 힘줄을 대신해
사람 형상 하고 우두커니 서 있네
심장도 없고 뱃속도 텅 비어
이 넓은 천지간에 보도 듣도 않는 허수아비여
앎이 없으니 싸울 일이 전혀 없겠구나

(성운 '허수아비' 모두)


성운은 16세기 때 남명 조식과 더불어 현실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속세에 묻혀 성리학의 이론보다는 현실적 실천을 강조한 비판적 지시인이다. 제4부 <인생>에 실려 있는 이 시에 대해서 시인은 "때로 나도 그렇게 세상에 서 있고 싶"다고 주저없이 내뱉는다. "그러면 무엇인가가 채워지겠지요"라며.

시인 김용택은 누구인가?
지금도 외딴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인

시인 김용택은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82년 <창작과비평>에서 펴낸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 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진강><맑은날><누이야 날이 저문다><꽃산 가는 길><그대 거침없는 사랑><그 여자네 집><나무>가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섬진강 이야기><섬진강 아이들><인생>이 있다.

그밖에도 시모음집 <시가 내게로 왔다>,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장편동화<옥이야 진메야>를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인 김용택의 시 세계는 탁월한 감성과 예리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농민시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이종찬
그렇다. 배가 부르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있다 해도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곳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앎이 없으니 싸울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 왈가왈부할 만한 그런 일이 없다는 그런 뜻도 되지 않겠는가.

"번잡한 생활에서 벗어난 편안함과 생기 도는 즐거움, 그리고 이 산 저 산 바라보는 한가로움으로 단풍 지는 초가을 산뜻한 산길을 산책하듯 이 시들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 시들을 읽으며 적막과 적요 속에 앉아 자기를 낯설어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시인의 말' 몇 토막)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는 틈틈히 한시를 읽었다는 김용택 시인은 아무리 바라봐도 지겹지 않은 앞산과 강물처럼, 옛시 역시 읽을수록 맛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은 작은 서재에 달빛이 범람하는 밤마다 잠 못 들고 일어나, 마당을 서성이고 강가를 배회하다 돌아와 옛시들을 펼쳐 놓고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었단다.

이처럼 시인 김용택이 이번에 펴낸 <김용택의 한시산책 1,2>는 그동안 사람들이 무조건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우리 옛시가 지니고 있는 깊고 맑은 향기를 새롭게 맡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우리네 삶의 내면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용택의 한시 산책 1

김용택 엮음, 화니북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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