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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흰 것도 네 앞에선 검은 잉크와 같아 무지한 새와 짐승들은 네 이름을 부르지 못해 절망하지 (주인공 마루의 극 中 대사)

▲ <코뿔소의 사랑> 중 연애수업 장면
ⓒ 서울프린지네트워크
막이 오르자마자 한 남자 배우가 무대 위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며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한다.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 얼른 핸드폰을 걸어 어디 있는지 물어 보라고 한다.

무대 위에 펼쳐지는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체제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던 그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중국의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 역시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다.

한국, 중국, 홍콩, 일본, 싱가폴 등 아시아 문화예술 네트워크를 추진 중인 넥스트 웨이브 2003에서 첫선을 보인 중국국가화극단의 <코뿔소의 사랑>은 자본주의의 급물살을 타고 급변하고 있는 북경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줌에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하나 더, 더 이상 중국정부 산하의 예술단체가 선전, 선동의 도구가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국가화극원 (中國國家話劇院)
중국 현대 공연예술계의 창작 전초기지

‘중국국가화극원(National Theatre Company of China)’은 애초 별도로 운영되던 “중국청년예술극단”과 “중앙실험극단”이 2001년 통합되면서 창설되었으며, 현재 중국과 북경을 대표하는 극단중의 하나이다.

창단 이후, 중국국가화극원은 국립 공연예술단체로서 전통 문화의 계승과 더불어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공연예술을 추구하고 있으며 신진 예술가들에게 수준 높은 창작 무대를 제공하는 터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창작활동을 통해 중국국가화극원은 중국 현대연극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 서울 프린지 네트워크 홍보팀
코뿔소 조련사인 마루가 비서로 일하는 커리어 우먼 밍밍을 짝사랑하는 이야기를 그린 <코뿔소의 사랑>은 중국현대연극의 차세대 연출가로 불리는 멍징후이의 4번째 작품이기도 하며, 1999년 북경 인민예술소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부터 올 10월 재공연 때까지 연일 매진을 기록한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코뿔소 툴라의 조련사인 마루가 비서인 밍밍을 짝사랑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프리카에서 온 툴라는 스무살이 넘었지만 유별난 고집 때문에 다른 코뿔소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짝짓기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툴라는 매우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는데 그의 조련사인 마루 역시 남다른 후각을 자랑하는 청년이다.

그에게는 대선과 흑자라는 친구가 있지만 그는 단지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이야기할 뿐이라고 한다. 코뿔소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외골수 툴라와 그의 조련사 마루의 이야기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마루의 독특하고 심오한 정신세계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 급기야 밍밍을 납치하는 마루
ⓒ 중국국가화극단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무모하게 밍밍을 납치까지 하는 마루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쩌면 편집광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마루’는 전혀 현명한 인물은 아니다.

소위 현명함이란 불가능한 것은 욕심 내지 않는 미덕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상과 처해진 현실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닥칠 괴로움과 타인으로부터 받게 될 비웃음을 모면하게 해준다.

하지만 가끔 우리 주변에는 현명하지 못한 툴라나 마루와 같은 ‘군중 속의 코뿔소’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편집증 혹은 고집이 없다는 것은 곧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새로운 세계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대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이 삶에서 어떤 것을 고집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집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소멸하지 않는 욕망이며, 동시에 피곤한 일상에 존재하는 영웅적인 몽상이기도 하다. ‘마루’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녀를 잊을 수 없다.”

오랜 역사와 그 안에서 다져진 중국민족의 예술성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인지 이 작품의 대사 하나, 하나가 아름다운 시구이며 작품이다. 특히 밍밍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마루의 노래와 시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름답다.

무대 뒤에 설치된 은박 벽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흰색 페인트칠마저 뛰어난 산수화로 보이고 그 위에 투사되는 영상과 문자들은 비디오 아트로 보일 정도다. 극 중 인물의 감정을 북돋우는 코러스의 기타 연주와 노래 역시 뛰어나다.

아쉽게도 중국현대 연극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의 공연은 단 1회만 남아 있다. 마루처럼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계시는 분, 중국문학을 공부하시는 분, 모처럼 한가로운 평일 저녁을 향유하실 분은 당장 문화일보 홀로 달려가서 <코뿔소의 사랑>을 만나보시길 권한다.

멍징후이 (孟京輝 Meng Jinghui)
중국 현대 연극계의 기린아

중국국가화극원이 배출한 대표적 현대극 연출가 멍징후이는 현재 중국에서 그 이름 자체가 흥행의 보증수표가 될 정도로 평단과 관객의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올해 38세인 젊은 연출가 멍징후이는 10년전인 1990년대, 중국 현대연극계가 아직까지 아카데믹한 보수적 울타리에 갇혀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연극에 치우쳐 있던 시절 ‘실험극’에 도전함으로써 기존 공연예술계에 대한 반기와 도전을 행했던 이단아로서 현대 중국 연극을 다시 썼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아방가르드적 경향은 무대 언어의 넘치는 에너지로 대중적 흡인력 또한 갖춰 명실공히 중국 현대극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다양한 연극 연출과 아울러 최근엔 영화 “Chicken Poets"의 감독을 맡아 중국 현대예술계에서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게트 원작 / 1991)
“I Love XXX 我愛 XXX" (멍징후이 등 공동창작 / 1994)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 (다리오 포 원작 / 1998, 2000)
“코뿔소의 사랑 Rhinoceros in love" (리아오 이메이 작 / 1999, 2003) 등 / 서울 프린지 네트워크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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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영상번역작가.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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