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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첫 짐을 풀 때의 일이다. 몇 년을 지내야 할 곳인데, 직접 와보지 못하고 전화와 우편으로 기숙사 방을 신청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방은 단정하고 깨끗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그처럼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인데, 작은 방이라고 해도 꽤 넓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아무런 확인없이 가장 작은 방을 신청했던 것이다.

네 벽의 길이가 같은 정육면체의 방이어서, 마치 큰 상자 안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왼쪽 벽에는 침대가 길게 놓여있고, 정면과 왼쪽 벽에는 책상과 옷장이 각기 놓여있어, 유일한 공간이라고는 책상에서 출입문을 직선으로 잇는 좁은 통로뿐이었다.

이건 방이라기보다는 흡사 세 개의 벽 사이에 난 골목길 같았다. 그 좁은 통로에는 점점 비대해져가는 나의 몸이 앞뒤로 수직 이동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활동도 허락되지 않았다. 책꽂이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들쳐보지도 않으면서도 책은 닥치는 대로 사 모으는 수집벽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내게는 책을 놓을 공간이 필요했다. 한 달 후, 한국으로부터 책 상자가 도착하면 그나마 나 있는 통로까지 막힐 판이었다. 책을 놓을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퍼즐을 맞추듯 가구를 이리 저리 옮겨 최대한의 여유공간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 와중에 침대가 두 차례 섰다 넘어졌고, 소형냉장고가 책상 위로 서너 번 오르내렸으며, 옷장이 대여섯 번 문밖으로 드나들었다. 책상과 옷장 사이에 책꽂이 하나를 놓을 자리를 겨우 마련한 후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루실(Lucile)인데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간간이 몰아쉬는 숨 때문에 그녀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황해서 시계를 보니,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선가 미국인들이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몇 번이나 깼는지 알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고 사과를 해야할 지…. 제가 오늘 처음 이사를 와서 짐 정리하느라 소란을 피웠습니다. 분명히 약속드리지만, 오늘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참, 그리고 제가 요즘 박사논문을 쓰고 있으니까, 밤에는 조용히 해 주시길 바래요. 제가 좀 민감한 편이어서 쉽게 잠에서 깨거든요. 제가 잠자리에 드는 열 시 이후에는 웬만하면 소리를 내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풀려가고 있었다. 많은 미국의 건물이 그렇듯, 이 기숙사도 소리가 잘 울려 퍼지는 목조건물이었다. 가끔 다른 학생들이 내 방 앞을 지나쳐 갈 때, 그 발자국 소리가 묘한 공명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 같은 소음을 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만, 저더러 밤 열 시 이후에 아무 활동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겠지요?"
"여기는 모두가 함께 사는 커뮤니티예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지요."
"하지만 저는 열 시면 대낮인데요."

난 다시 물었다.

"혹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나요?"

여자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예. 좀 조용히 걸으실 수 없을까요?"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다.

"이것 보세요. 나도 이 커뮤니티의 일원이고, 따라서 나도 당신의 존중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과 달리, 나는 열 시 이후에도 움직여야 해요. 내가 정상적으로 걷는데도 당신이 발자국 소리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이건 나의 문제가 아니라 건물의 문제 아닌가요?"
"이 건물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서 내 목소리도 높아진다.

"나더러 날아다니라는 거요?"

작은 기숙사방에 대한 짜증과 노동의 피로가 분노를 자극해, 나는 생각나는대로 여자에게 쏘아붙였다. 그 괘씸한 여자가 내 말에 상처받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여자도 지지 않고 응수하다가, 일순간 태도를 바꾸고는 말한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오늘 처음 왔다고 했지요?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내 이름은 루실이고, 이 기숙사의 관리자로 일하고 있어요. 우리 기숙사에 온 걸 환영해요."

나는 이곳에서의 삶이 초장부터 꼬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토스터 속에 빵이 걸려 새까맣게 타는 바람에 화재경보기가 울렸고, 덕분에 나는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소방서 직원과 경찰을 차례로 만나야 했다.

그로부터 사 년이 흘렀다. 첫날부터 대판 싸웠던 루실과 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한 가지를 잘 했고, 다른 한 가지를 잘 못 한 것 같다. 잘 한 것은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당당히 대응했다는 것이고, 잘 못한 것은 후반에 불필요하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이다.

지지 않고 응수한 덕분에 나는 날아다니기 위해 체중조절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목소리를 높인 덕분에 상대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몇 달이 더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와 화해하기 전까지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그녀의 방 앞을 지나다녀야만 했다.

미국인들은 어릴때부터 토론에 익숙해진다.
미국인들은 어릴때부터 토론에 익숙해진다. ⓒ 강인규
흔히들 한국인들이 토론에 약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사람들이 특별히 말재주가 없거나 감정절제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토론'이라는 것이 크게 요구되지 않았던 사회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토론이 그다지 바람직한 의사교환 양식이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그리고 신하가 임금에게 '토론'을 걸어 온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탈이었기 때문이다. 대인관계가 수평이 아닌 수직선상에 존재하는 위계사회에서 토론은 존재하기 어렵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한 사회의 소통양식을 "고상황(High-Context)"과 "저상황(Low-Contex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고상황 문화"란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 대화의 내용과 형식이 사회적으로 결정되어있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목마른 두 사람이 물가에 동시에 도착했을 때, 고상황 문화권의 사람들은 누가 먼저 물을 마실까에 대해서 토론할 필요가 없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우선권이 양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 ⓒ Anchor
이처럼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상황적 의미체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위계질서는 고상황 문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홀에 따르면, 고상황 문화권의 대화는 경제적이고, 신속하고, 또 효율적이다. 문자 그대로 '말이 필요 없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의미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토론을 벌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홀의 지적대로, 이런 고상황 문화권의 사회는 획일적일 수밖에 없고 변화에 적응하는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사회는 한국에 비해 이런 위계질서가 약하다는 점에서 "저상황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보편적 상황이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매 상황마다 서로가 합의할 만한 의미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한다. 그런 면에서 토론이란 많은 인내심과 시간이 필요한 대단히 '비효율적인' 의사소통 양식이다.

위계사회에서라면 고함 한마디면 끝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저상황문화에서는 서로가 만족할때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자동차 접속사고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사건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 (상대방이 묻지도 않은) 사회적 직책과 나이를 제시하는 것도 이미 프로그램된 상황적 의미를 끌어들임으로써 '간단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사회적 권위를 통한 해결이 어려워지면 '포효'소리의 크기를 통해 우위를 가리는, '자연적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유학생으로 처음 수업을 들을 때 가장 곤란했던 순간은 머리가 가려울 때였다. 손가락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순간, 강의를 진행하던 교수는 말을 멈추고 내 질문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모든 교수들이 학생들의 손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주저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았다.

토론수업의 경우에는 교수들이 아예 학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에 참여한다. 교수 역시 손을 들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말을 하던 학생은 손이 올라온 순서대로, "스테파니, 숀, 그리고 마이클"하며 차례를 정해주곤 한다.

미국인들은 태어나는 동시에 발언권을 얻는다. 어리다고 해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법은 없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의 양해를 얻는 것이다.

몇 년 전, 가방가게에서 있던 일이다. 한 미국인 부부가 아이의 지갑을 사주러 왔다. 네 개의 지갑을 눈앞에 펼쳐놓은 아이는 무엇을 골라야 할 지 몰랐다. 네 개 모두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부모는 그렇게 서서 아무말없이 아이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 아이가 결정하기가 어려운지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머니는 "고르기 어려우면 엄마가 도와 줄까?"하며 나선다.

"첫 번째의 파란 색은 활동적으로 보여. 너의 취향에 잘 맞을 듯도 한데, 네 생각은 어떠니? 두 번째 갈색은…뭐랄까, 모험심 많은 탐험가, 자연, 숲, 뭐 이런 게 떠오르고. 세 번째 검은 색은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여. 네 번째 빨간 색은…."

아이는 네 개의 지갑 중에서 한 개를 내려놓는다. 이제 세 개를 놓고 아이가 고민한다. 부모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의 결정을 기다린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돕겠다고 나선다.

아버지의 조언에서도 아이의 판단을 강제할 만한 부정적인 표현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지갑 하나를 놓고 이십 여 분 동안 아이와 대화하는 부모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부모들에게는 5불짜리 선물 하나 사주는 것도 교육의 과정이었다.

아마 나라면 대략 이런 식의 조언이 나왔을 것이다.

"야, 내가 보기에는 다 똑같다. 아무거나 고르지 그러냐?"

그렇게 자란 미국 아이들은 대체로 무리한 떼를 쓰지 않는다. 부모를 대화로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며 떼를 쓰는 아이들은 빈방에 갇히거나 며칠간 텔레비전을 못 보는 형벌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가정에서부터 자신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개진하는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공교육의 장에서도 남의 의견을 귀기울여 듣고 그것을 정중하게 반박하는 법을 배운다. 많은 대학의 학과가 연설(Speech)수업을 필수과목으로 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의가 너무 커 교수와 학생의 대화가 어려운 경우에는 별도로 토론시간을 운영한다.

시험 후의 해방감에 환호하는 미국의 대학생들
시험 후의 해방감에 환호하는 미국의 대학생들 ⓒ 강인규
당연히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은 시험이 끝난 후 교수들을 귀찮게 한다. 자신이 받은 점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며 찾아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점수를 높이려는 학생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학생들은 합당한 의문을 가지고 교수를 찾는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않는 한, 이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합리적인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두 번 다시 교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문의에 대비해 시험지를 일 년 간 의무적으로 보관해야 한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평가하지만, 강의 마지막 날은 학생들이 교수를 평가한다. 그 평가서에는 "강사가 전공분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부터 "강사는 학생들의 질문에 성실한 태도로 답해 주었습니까"에 이르는 수십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들은 이 평가항목을 통해 교수를 평가하고, 뒷면에는 교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관식'으로 쓸 수 있다.

교수와 강사를 가장 긴장시키는 이 뒷면에는 "그 빨간색 셔츠, 전혀 안 어울리는데 줄기차게 입고 다니시네요"부터 시작해 "이 강의가 내게 준 가장 큰 기쁨은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등의 다양한 의견이 채워진다.

미국대학의 교수 강의평가서
미국대학의 교수 강의평가서 ⓒ 강인규
교수들의 강의평가내용은 수량화되어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써 앞으로 수강할 학생들을 위한 참고자료로 이용된다. 교수들의 강의평가가 그들의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다. 학생들은 이 강의평가를 보면서 모교수의 수업이 들을만하지 아닌지의 여부를 두고 또 다른 토론을 벌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좁은 방에는 몇 년 치의 시험지와 강의평가서가 더해졌다. 방을 옮겨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한참 뒤 알게 된 일이지만, 내 발자국 소리는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큰 편이었다. 아무래도 체중까지 줄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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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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