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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 논

가르릉 가르릉 이앙기 돌아가며
산중 다랑논에 모포기 꽂히더니 어느새
그루터기만 앙상한 벼 포기들
누렇게 황달들어가고 있다
콤바인 지나간 자리

후들거리는 다리로 거름 내던 영감은 어디가고
저승꽃 새까만 팔뚝으로 피사리하던 할멈은 어디가고
그 모든 수고 무심히 쓸어안고 간 흔적
콤바인 지나간 자리

긴 잠에 들어가는 산중 다랑논
긴 잠에 들어가는 산골 늙은 농부
깊게 패인 콤바인자국 아물기 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굽은 등 뒤로 짧은 가을해
딸꾹, 넘어간다.


▲ 진안군 주천면 무릉마을 전경
ⓒ 이규홍

여느 농촌 마을과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있는 곳도 젊은 사내라곤 동네 이장님과 나, 달랑 둘 뿐이다. 우리 둘이 어디 모임이라도 가고나면 말 그대로 동네에 젊은 놈이란 종자는 먹고 죽을래도 없다.

칠순 고개를 훌쩍 넘어 낼 모레면 팔순을 맞을 고리삭은 어른들 틈에서 우리는 언필칭, 마을의 내일을 짊어지고 갈 새싹들임에 분명하다.

추수가 끝난 요즘 같은 때면 어른들로부터 내가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애기 아빠, 오늘 바뻐유?” 이건 할머니들의 질문.

“어이, 자네 나줌 바. 이따가 뭐햐.” 이건 할아버지들의 질문.

“고상시럽것지만 원제 나 방아 좀 쪄다주면 안되까? 토요일 전까지만 해 주면 되는디…”

어른들이 이렇게 나오시는 건 일요일에 다녀 갈 자식들이 있다는 뜻이다.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쌀가마라도 실어 보낼 생각일 게다.

객지에 나가 살면서 때만 되면 베시시 낯짝 디미는 인간들을 곱게 보지 못하는 내 성질대로라면 ‘아, 그 자식들 보고 나락 가마니 져다 방아 찧어 먹으라고 하세요.’ 이런 말이 곧 튀어나올 법 하지만 차마 그럴 순 없는 일이다.

“예, 그러지요.”

서울 가 산다는 핑계로 농사철 내내 논에서 피 한 번 뽑지 않고, 밭에다 거름 한 번 내보지 않은 자식들을 위해 내가 심부름을 하는 건 아니니까.

휴가철이면 산으로 바다로 갈 시간은 있어도, 고향 논밭에서 고생하는 어른들 위해 손 좀 보태마고 달려올 시간은 없는, 싸가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식들을 위해 내가 심부름 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속을 달래야지 별 수 없다. 그 어른들 앞에다 대고 ‘아저씨, 이거 팔아 돈 만들어서 그냥 쓰고 싶은데 쓰면서 사세요. 왜 자식들한테 다 주고 그러세요? 아저씨네는 맨날 묵은 나락만 드시면서….’ 이렇게 나가면 내가 싸가지 없는 놈 된다.

“자식들이 용돈은 좀 드려요?”
“허허, 용돈은 무신(무슨). 갸덜이 먼 돈이 있어? 경기가 이르키(이렇게) 안 존디(좋은데). 가져가지나 않음사 다행이제.”

하루빨리 경제가 좋아지길 바라는 게 빠를지, 철없는 자식들이 부모 속 헤아려주길 바라는 게 빠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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