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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윤영
“죽을 고비 넘겨가며 지금껏 사명감 하나로 버텨왔습니다. 26살 때부터 시작했으니 어느덧 35년이 됐네요. 25살까지가 제1의 인생이었다면, 이 일을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제2의 인생을 살고있습니다.”

지난 68년부터 소방관으로 근무해 이곳에서 청춘을 바친 대전 동부소방서 이승식(60) 서장은 대전 지역의 크고 작은 화재 현장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시내 중앙시장 대형 화재를 3번이나 겪었고 20여 년 전, 신탄진에 위치한 대규모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100여억 원 피해가 났던 사건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화재를 진화하며 재산피해나 인명피해를 지켜봐야 하는 것은 언제나 안타까운 현실.

오랜 시간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한 그에게는 가장 잊지 못할 화재는 불과 1년전의 일이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세탁소 화재에서 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밤 12시까지 일을 하고는 전기다리미 코드를 뽑지 않아 과열된 것이 화인었죠. 부인, 처제, 아이들 3명이 죽고 남자 혼자 살아남았는데 부인은 남편과 손이 달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아이들을 꼭 껴안고 죽었어요.”

그에겐 소방관으로서의 활동과 그에 따른 사명감이 전부였다. 단 한번도 자신의 일에 후회하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 서장은 불길과 맞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 경험하기도 했다.

지난 81년 발생한 대전 홍명상가 3층 화재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위험천만했던 순간. 새벽 1시 연기에 막혀 옥상으로 통하는 문턱에 쓰러진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방송으로 그의 죽음을 알렸을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그를 포함해 3명의 소방관이 사망 직전의 순간까지 갇혀있었는데 가까스로 옥탑으로 올라가는 철탑을 발견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평소에는 내 앞에 죽음이 닥치면 부모, 형제, 처자식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안타까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머리 속이 백지상태가 되더군요. 질식할 것 같은 연기 속에서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고 싶다는 생각, 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대전역 기관차에서 화재가 났을 때에는 아무리 불을 꺼도 진화가 되지 않아 기관차 위로 올라가 약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곧 폭발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그는 홀로 기자튀로 올라가 약품을 투입했고 결국 화재가 진화됐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약품 투입을 하기 위해 불과 몇 미터를 걷는 동안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지만, 사명감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이렇듯 소방관 생활을 하면서 불길과 죽음, 그리고 자신과 끊임없는 사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화재 진압 외에도 시민들이 불편을 느낄때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가 처리해 주는 소방공무원으로서의 그의 보람은 매우 크다. 소방관이었던 사촌형님을 보고 소방관의 꿈을 키웠던 이 서장은 그렇기에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다. 68년 대전에 소방서가 오로지 한 군뿐이었던 시절, 함께 입사한 30명의 동료 중 유일하게 그 혼자만이 현직에 남았다.

일에 대한 애착이 유독 강한 이 서장은 선비처럼 대쪽같이 올 곧은 사람이다.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던 그는 지난 97년 크나 큰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의 결심은 누구나 쉬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리라.

“직장을 다니던 28살 둘째 딸이 있었습니다. 약혼자도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비록 딸은 일찍 죽었지만 죽은 딸을 대신해 세상에 좋은 일을 할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장례를 치른 후 5천만 원을 만들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대주고 있어요.”

딸의 모교와 대전 대덕구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1년에 4명씩 학자금을 대주고 있다. 어느덧 5년째 계속 되고 있다. 가끔씩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받기도 하고 고교졸업 후 대학을 입학한 학생들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

그리 녹록치 않았던 삶을 걸어 온 이 서장은 현재 정년퇴직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제3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쉼표 없이 살아왔던 그는 이제 여행과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단다.

그는 가끔씩 질문을 받는다. “지금 건물이 무너질 염려가 있고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말이다. 대답은 이렇다.

“9·11 테러 당시 340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소방관이 죽었습니다. 구조하러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밖으로 피신하며 곧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죠. 소방관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1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안으로 들어갔어요. 우리도 같습니다. 급박한 순간에도 구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불길로 뛰어들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소방관들의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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