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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러나 이곳 뉴질랜드에서의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은 대개 산타 퍼레이드로부터 시작됩니다. 뉴질랜드에서는 각 도시마다 그리고 같은 도시 내에서도 지역마다 산타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이 오랜 전통이 되고 있는데, 바로 어제가 오클랜드의 산타 퍼레이드 날이었습니다. 신나는 구경거리라면 빼놓지 않고 보는 우리 가족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요.

아침에 잠깐 볼일을 보고 오클랜드 도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퍼레이드가 시작되려면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주차를 하고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퀸 스트리트(Queen Street)를 따라서 걸어갑니다.

영어 간판들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그 중에서 3년 전, 처음 오클랜드로 여행 왔을 때 들렀던 식당을 찾아 들어갑니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김치 맛과 찌개 맛은 그때 먹었던 맛이랑 달라진 게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와 보니 12시부터 차량이 통제된 도로에는 이제 사람들의 물결로 걷기조차 힘듭니다. 도로변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아내와 딸 동윤이와 함께 앉았습니다. 잠시 후 내 옆자리에는‘애린’이라는 여섯 살짜리 한국인 꼬마가 앉았습니다. 산타 퍼레이드는 처음이라는 애린은 몹시도 기대가 되는 표정입니다.

ⓒ 정철용
아직 1시간이나 더 남았는데도 애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지루함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광대들과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요정들이 수시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웃겨대니 지루할 틈이 없지요.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자원봉사자들이 나타나서 모금함을 내밉니다. 올해에는 근육 위축증으로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에게 성금이 기부된다고 하더군요. 동윤이는 내게서 받은 2달러짜리 금색 동전 하나를 모금함에 넣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애린이도 고사리 같은 손을 모금함으로 내밀더군요. 한자로 쓰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의 그 애린(愛隣)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은 분명‘애린(愛隣)’이 틀림없었습니다.

ⓒ 정철용
2시가 조금 지나자 드디어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퍼레이드 행렬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코틀랜드식 치마를 입은 백파이프 밴드가 다가오고 있지만 내 귀에는 그 너머 멀리서 들려오는 흥겨운 꽹과리 소리와 둥둥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매년 이 퍼레이드에 한국을 대표하는 팀으로 참가하고 있는 우리의 사물놀이팀 마당 한누리가 올해도 어김없이 참가한 것입니다.

ⓒ 정철용
그런데 마치 인해전술을 펼치듯이 사람 수로 밀어붙이는 중국 팀에 비하면 그 인원이 너무나 적습니다. 또 화려한 색상의 용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대만 팀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은 인원에도 징과 꽹과리와 장구와 북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사물놀이 소리는 너무나 크고 신명이 넘쳐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습니다. 올해는 뜻 있는 몇몇 교민들이 고운 한복으로 차려입고 퍼레이드에 동참을 해서 더욱 보기 좋더군요.

ⓒ 정철용
오클랜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 이렇게 각 나라별 단체들이 산타 퍼레이드에 많이 참가합니다.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옷을 입고 캐럴이 아니라 자신들 나라의 고유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행진하지만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냅니다.

그때 환호성을 올리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조국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지요. 우리도 마당 한누리가 지나가자 환호성을 올립니다.

ⓒ 정철용
하지만 가장 많은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광대들과 요정들과 만화 속 주인공들이 등장할 때입니다. <피터 팬>에 나옴직한 해적선도 지나가고 산타 복장을 한 곰돌이 푸우도 등장합니다.

소리를 질러대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그들은 정말 현실 속의 살아있는 친구들입니다. 이제 제법 큰 딸아이도 눈을 떼지 못하고 여섯 살 애린이도 손을 흔들어 줍니다.

ⓒ 정철용
퍼레이드 중간 중간에 장대발로 키를 키운 거인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은 안장에 앉은 광대가 외발 자전거 묘기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퍼레이드 행렬에서는 사람들에게 물총을 쏘아 시원한 물벼락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 정철용
이윽고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햄의 마굿간이 지나가고 그 뒤로 사슴들이 끄는 썰매에 앉은 오늘의 주인공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 순서가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산타가 오늘 퍼레이드의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매년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불우한 환경에 처한 어린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는 데 큰 뜻이 있는 만큼 산타가 아니라 아기 예수가 퍼레이드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정철용
어쨌거나 산타의 등장에 사람들의 환호성은 절정에 달하고 1시간 30분 동안의 퍼레이드가 마침내 막을 내립니다. 산타의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진합니다.

애린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옆을 보았더니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틈엔가 벌써 산타를 뒤따르는 저 행렬 속으로 따라나선 모양입니다. 여섯 살짜리 애린이는 처음 본 산타 퍼레이드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2년 전 처음으로 보았던 산타 퍼레이드에서 우리의 사물놀이 장단을 들었을 때 나는 뜨거운 감동으로 가슴이 온통 진동했었지요. 그 처음의 감동만큼은 아니지만 이역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펼쳐지는 산타 퍼레이드에서 둥둥 가슴을 울리는 우리의 소리를 듣는 것은 감동이었습니다.

ⓒ 정철용
동윤이와 애린이도 조국이 무엇인지 우리의 소리가 무엇인지를 느낄 줄 아는 나이가 되어 다시 산타 퍼레이드를 보게 된다면 둥둥 울리는 저 북소리를 듣고 나처럼 온몸이 진동할까요?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해외에 나와 사는 이민 1세대의 책임이요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5년 후 또는 10년 후의 산타 퍼레이드에서는 북채와 장구채를 들고나선 동윤이와 애린이의 얼굴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클랜드 산타 퍼레이드의 역사

올해로 56회를 맞는 오클랜드의 산타 퍼레이드가 처음 펼쳐진 것은 1947년이다. 당시 유통업체 파머스(Farmers)의 창업자인 로버트 레이들로우(Robert Laidlaw)는 도시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써 퍼레이드 행사를 생각해 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 행사를 ‘파머스 산타 퍼레이드’라고 부르고 있다.

첫 행사 때에는 파이프 밴드, 마칭 밴드, 광대와 요정들 그리고 고아원의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행진하는 단순한 퍼레이드였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15,000여명의 인파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4000명이 넘는 인원이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이를 구경하려고 25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는 오클랜드 최대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매년 오클랜드의 시내 중심가 2.2km를 가로지르며 1시간 30여분 동안 펼쳐지는 화려한 퍼레이드 행렬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엿볼 수 있어 파머스 산타 퍼레이드는 가히 세계문화의 스펙트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 정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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