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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책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문학동네
인생에 있어 삼십대란 '어릴 적'과 '나이 듦'의 경계선 상이다. 이 경계선에서 누군가는 과거를 회상할 것이며 또 어느 누군가는 미래를 계획할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과거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대 별로 유사한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94년 작가세계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새롭게 주목받은 젊은 작가 김연수의 연작 소설집이다. 그는 이 소설집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십대, 이십대의 삶을 재구성한 자전적 소설들을 토해 내었다.

그가 전하는 삶의 이야기들은 그 자신의 삶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허구적 스토리와 잘 짜여진 구성, 개성적인 문체를 통해 전달되는 단편적 소설들이다. 그가 재구성한 과거들은 1970년대의 유년이며, 80 - 90년대의 청년기이다.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지고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가 한참일 때, 나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웃긴 생각이었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어. 영양을 덮치는 들개들처럼 사람들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달려들어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려." - 첫사랑 중에서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니다가 문득 떠올린 첫사랑의 추억 속에서 주인공은 아름다움과 공존하는 추악함을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정의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바다의 한때나마 꿈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있기에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뉴욕제과점의 아들로 살면서 겪은 일들을 소설로 전개한 <뉴욕 제과점>은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엮어 가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성숙한 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뉴욕 제과점 중에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에, 또 세상에는 늘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한 인간은 성숙의 단계를 밟는다. <뉴욕 제과점>은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 가는 주인공의 내적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정신적 혼란과 성숙을 깊이 있게 그려내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과거는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혼란과 이를 통한 내적 성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즐거운 추억의 혼재 속에 존재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행복과 불행의 감정이 공존하는 것처럼, 그의 소설들은 이 두 가지의 모순된 상황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기에 받아들이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또 죽었다. 지금은 그 거리에도 낯선 가게가 많이 들어섰다. 한때 포목점과 양장점과 제화점과 지물포와 중국집 등이 있던 자리에 화려한 대기업 상표를 내건 대리점들이 다붓하게 들어섰다. 물물교환 하듯이 꼭 서로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던 옛 인정들을 모두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일 주일에 한번 정도 시 외곽에 생긴 대규모 할인점을 찾아다녔다." -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중에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방 소도시의 보건소 의사, 빵집 주인, 다방 점원, 동네 깡패 등 다양하다. 그들은 70 - 90년대를 살아온 소시민들의 대표이며, 이런 저런 이유로 삶의 애환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펼치는 사건들 또한 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다. 주변에서 쉽게 만날 것 같은 인물들을 포착하여 그들의 삶의 방식과 사소한 사건들을 전개한다는 점이 바로 이 연작 소설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커다란 충격은 없지만 작은 이야기들 속에 70 - 90년대 삶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연작 소설집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투박한 사투리의 구사이다. 전라도 지방과 경상도 지방의 사투리를 넘나들며 표현되는 인물들의 사투리는 작품의 사실감과 현장감을 더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말이라, 인간이 어디까지나 악해질 수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원래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지만서두 악하자고 들만 무한정 악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란 말이다. 윤상군 유괴사건 알지? 우째 그라겠나 말이다. 우째서 교사라 카는 기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가." -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중에서

"아빠! 누구 맘대로 일기장을 본 거여! 니가 뭣을 안다고 학살이니 분노니 나불대는 거여! 니가 뭣을 안다고? 대체 니가 뭣을 안다고? ...... 나가 왜 몰라요?" -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중에서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70 - 90년대 과거의 재구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때에,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그와 그녀가 겪은 삶일지도 모른다. 그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이, 가난했던 과거가, 격변기의 대학 생활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지음, 문학동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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