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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傳燈寺)는 특이하게도 고조선시대의 유적과 더불어 근대시대의 유적까지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했다는 삼랑성은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조선조와 근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사고가 있었다.

▲ 전등사 찾아가는 길
ⓒ 이현상
새로 난 초지대교를 이용하면 보다 빠르게 전등사에 이를 수 있다. 초지대교를 건넌 후 우회전하여 길상면을 거쳐 전등사로 간다. 48번 국도를 이용하여 강화대교를 건넜다면, 곧바로 좌회전한 후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오는 것도 추천할만하다.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광성보, 덕진진 등의 유적지를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 1920년대의 전등사 전경
ⓒ 전등사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위치한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에 고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축조하였다고 전하여 오는데,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 불리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충렬왕의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진종사에 옥등을 보시하여 그후로 전등사(傳燈寺)가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전등사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삼랑성
ⓒ 이현상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실제 고조선의 유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랑성은 그 높이가 3미터에서 9미터 정도이며, 전체 길이는 약 2300미터에 이른다.

삼랑성(三郞城)의 전설
-단군의 세 아들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하였으며, 삼랑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 이현상


▲ 경내의 오솔길
ⓒ 이현상
삼랑성 출입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경내에 이른다. 삼랑성 동문 지나 오른쪽으로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이 비는 병인양요(1866)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1873년 강화도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전등사 경내는 현재 증축과 보수공사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제178호), 약사전(제179호), 범종(제393호) 등 모두 3개의 보물이 있다.

▲ 대웅보전 내부의 석가여래 삼존
ⓒ 이현상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조선후기의 건축물로서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유명하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 약사전(보물 제 179호)
ⓒ 이현상
약사전(藥師殿)은 이름에서 보이듯이 중생의 병을 고친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건축양식은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중기 건축물로 짐작된다.

▲ 대웅보전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
ⓒ 이현상
전등사에 들르면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곳이 있으니 다름아닌 대웅전의 나부상이다. 이 나부상에는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과 사랑에 빠져 둘은 틈틈히 사랑을 나누었다.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그 여인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 버렸다.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지었는데,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고 한다."

▲ 최근의 전등사 전경
ⓒ 이현상
전등사에는 삼랑성의 전설과 나부상의 전설 이외에도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온다. 이 은행나무는 신기하게도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날 전등사에 관가사람들이 찾아와 은행열매를 스무 가마니만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의 양은 열가마니 정도뿐이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승에게 알렸고 노승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등사로 온 추송스님은 은행나무가 더 열리게 하는 3일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이고 군관도 찾아 왔다. 그리고는 불가능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멀쩡하던 군관의 눈이 맞은 듯 부어올랐다. 3일 후, 은행나무에서 기도가 막바지에 이르러 염불소리가 멎었을 때 추송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앞으로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아닌 비가 무섭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스님도 노승도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들 하였고 이후 전등사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다 하였다."

▲ 외규장각 도서반환 기원등
ⓒ 이현상
전등사 경내에는 특이한 기원등을 볼 수 있다.바로 외규장각 도서반환 기원등이다. 전등사는 2만개의 등불을 밝혀 프랑스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가 하루빨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에게 약탈되어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하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축제를 통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삼랑성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올해 10월에 열렸던 축제에서는 많은 주민과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위한 여론확산 및 향후 프랑스와의 보다 우호적인 친선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공식 홈페이지 http://www.samnangseong.org)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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