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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돌을 맞은 딸아이를 안고 계신 나의 어머님
돌을 맞은 딸아이를 안고 계신 나의 어머님 ⓒ 정철용
딸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러 매주 한 번씩 김 선생님 집에 레슨을 받으러 갑니다. 우리 집에서 멀기 때문에 늘 내가 자동차로 데려다 주고, 레슨을 받는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태우고 오곤 하지요. 그렇게 매주 한 번씩 만나다 보니 김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남편과도 무척이나 친해져서 이제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곳 뉴질랜드로 이민 온 시기도 비슷하고 가치관과 세계관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서, 매주 금요일 오후면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칠 지경입니다. 오후 4시에 가서 저녁 7시가 다 되어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아내는 말하곤 하지요.

"동윤이 피아노 레슨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당신 수다 떨러 가는 거지?"

지난 주 금요일에도 그렇게 김 선생님 부부와 얘기를 주고받았지요. 조금씩 친해지면서 속내를 드러내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었는데 그 날은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9살 때 아버지를 여읜 이후 숙부님과 숙모님의 손에 자라난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내게는 조금도 부끄럽거나 상처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숙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느 순간, 나는 그만 울컥 치미는 울음 때문에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나를 두고 말할 때 한 번도 '조카'라고 하지 않고 '큰 아들'이라고 소개했던 당신이 문득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나도 숙모님을 한 번도 '작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늘 '어머님'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친어머니처럼 공을 들여 나를 키우셨던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처럼 곱게 입고 어린 손주들과 함께 한 나의 또 다른 어머님
모처럼 곱게 입고 어린 손주들과 함께 한 나의 또 다른 어머님 ⓒ 정철용
이와 비슷한 일이 어버이날이 며칠 지난 5월의 어느 날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는 영어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중이었지요. 나이가 제법 드신 영어 선생님 앤(Ann)은 어느 할머니가 자기의 세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어 테이프를 틀어주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제 결혼해서 각각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딸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테이프 듣기를 마친 후, 앤(Ann)이 내게 묻더군요.

"이런 장모님 있으면 좋겠지요?"

그 말에 나는 우리 장모님은 그보다 훨씬 더 좋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장모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두 문장을 채 말하기 전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짧은 영어 실력 탓이 아니라 갑자기 복받치는 울음 탓이었습니다. 20년을 넘게 서울 변두리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양계를 하시면서 딸 둘과 아들 둘을 모두 대학교까지 보내신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내 울음 소동 때문에 한동안 수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옆에서 가만히 내 등을 토닥여주고, 같이 듣는 한 한국 여자 분께서는 사무실에 가서 휴지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다 큰 남자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 창피했지만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목소리는 크지만 웃음이 많고 인정이 많으셔서 지금도 소녀처럼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시는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아무 것도 따지거나 재지 않으시고, 단지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 만을 보고 당신에게도 몹시 소중했을 딸자식을 선뜻 내게 주신 장모님 역시 내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는 장모님을 '장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분 어머님 생각에 나는 두 번이나 남들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는 사내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기도 하더군요. 남들이 볼까봐 조심해가며 '남 몰래' 흘리던 내 눈물을 남들 앞에서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로 만드는 힘, 그것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인 모양입니다.

내 두 분 어머님께서는 뉴질랜드로 이민가는 우리를 보고도 서운해하시기보다는 축하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겠지요. 내가 흘린 눈물은 어쩌면 그 두 분께서 속으로 감추고 있었던 그때 그 울음이 이제야 내게서 흘러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교롭게도 내 두 분의 어머님은 생일이 나란히 이웃해 있습니다. 모두 음력으로 생일을 쇠시는데, 올해는 이번 주 토요일(11월 15일)과 일요일(11월 16일)입니다. 이제 만 나이로 예순 셋이 되시는 숙모님 아니, 나의 어머님과 예순 일곱이 되시는 장모님 아니, 나의 또 다른 어머님의 생신을 멀리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어머님 모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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