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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카르타에서 돌아온 후 자카르타의 처남 집에서 하루 숨을 돌리고 우리는 다시 여장을 꾸렸다. 이번에 갈 곳은 반둥(Bandung). 자카르타에서 동남쪽으로 약 170km 떨어져 있으니 하루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처남은 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 오가는 길에 볼 게 제법 많고 반둥 근처의 유황 온천도 좋으니 1박 2일로 여유 있게 다녀오라고, 우리가 족자카르타에 다녀오는 사이 숙소와 교통편을 벌써 예약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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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의 여행은 대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처남은 우리의 안전과 편리를 위해서 고맙게도 자기의 승용차를 내주었다. 그리고 거래하는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 반둥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을 수소문해 기사 겸 가이드로 붙여주었다.

그러나 ‘토픽(Taufiq)’이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길은 잘 알아서 기사로서는 제격일지 모르겠지만,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아서 가이드로서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가벼운 흥분 속에서 그가 운전하는 처남의 승용차를 타고 호사스러운 반둥행을 나섰다.

뿐짝 고개에서 ‘홀짝’ 차를 마시다

자카르타를 벗어나서 1시간 반쯤 달렸을까, 차는 경사진 좁은 오르막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그 길의 양쪽으로는 녹색의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풀밭이 아니다. 차밭이란다. 한국의 전남 보성의 차밭처럼 짙푸른 녹색의 차밭이 능선을 따라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녹색의 차밭과 함께 해발 1000미터의 고개를 올라간다. 그 고개 이름이 재미있다. 뿐짝(Puncak). 이곳 말로 ‘꼭대기(summit)’라는 뜻이라는데, 나는 자꾸만 ‘뽕짝’이 연상된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오르니 뽕짝 소리는 들리지 않고 향기로운 차 맛을 즐길 수 있는 휴게소들이 우리를 맞는다. 토픽은 그 중에서 가장 주차장이 붐비는 곳에 차를 세웠다.

뿐짝 고개를 오르는 길 양쪽으로는 녹색의 차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뿐짝 고개를 오르는 길 양쪽으로는 녹색의 차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 정철용
토픽에게 물어서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차를 주문하고 나는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침부터 배가 조금 쌀쌀한 게 심상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볼일을 봐야 될 것 같았다. 휴지는 안 쓰고 대신 왼손을 사용해서 물로 씻어내는 악명 높은 인도네시아의 화장실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나는 휴지를 준비해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화장실에는 휴지는 안 보이고 대신 물을 받아놓은 플라스틱 통이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항문의 입장에서는 위생적이기는 하겠지만 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찝찝한 노릇인가! 더군다나 이들은 수저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민족인데….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곳 인도네시아에서는 항문으로 향하는 왼손과 입으로 향하는 오른손의 분업이 매우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단다.

시원하게 비운 뱃속으로 따스하고 향기로운 차를 흘려보내니 한결 속이 편안해졌다. 특이하게도 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그 차의 맛은 입에서는 달게 느껴지더니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흘러들면서는 향기로운 풀내음으로 온 몸에 퍼져나갔다. 홀짝거리며 마시는 뿐짝의 따스한 차 한 잔은 반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다.

유황온천을 즐기며 반둥에서 빈둥대다

반둥회의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9개국이 참가하여 경제협력, 문화협력, 인권 및 민족자결, 종속민족문제, 세계 평화의 증진 등을 토의한 회의로 일명 ‘아시아ㆍ아프리카 회의’라고도 한다.
이 회의를 계기로 이른바 제3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아시아ㆍ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평화 10원칙’은 이 반둥 회의에서 결의된 ‘세계 평화와 협력의 증진에 관한 선언’에서 내세운 평화의 옹호와 증진을 위한 원칙이다. 반둥원칙이라고도 하는 이 ‘평화 10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기본적 인권 및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의 존중 ② 국가의 주권 및 영토 통합의 존중 ③ 인종과 국가 간의 평등 ④ 내정불간섭 ⑤ 단독 혹은 집단적 자위권의 존중 ⑥ 집단 방위협정을 대국(大國)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치 않고 내전(內戰) 불간섭 ⑦ 침략 및 침략의 위협, 병력 사용 금지 ⑧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⑨ 상호 이익과 협력 증진 ⑩ 정의와 국제 의무의 존중
뿐짝 고개에서 1시간을 더 달려서 우리는 반둥으로 들어섰다. 반둥은 해발 700미터의 고원도시로 연중 서늘한 기온과 쾌적한 날씨를 보여 네덜란드 치하에 있던 19세기 중엽부터 피서지 및 휴양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유럽풍의 아르 데코(Art Deco) 스타일의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 당시 반둥이 ‘자바의 파리’라고 알려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꽃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반둥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1955년 4월에 역사적인 제1차 아시아ㆍ아프리카 회의(일명 반둥회의)를 개최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제3세계 세력의 형성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이 반둥회의로 반둥은 세계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반둥 시내에 있는 한국음식점 ‘코리언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고 또 1시간을 더 달려서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찌아터 스파 리조트(Ciater Spa Resort). 이곳은 인도네시아 전통가옥식으로 지은 방갈로(bungalow)에 머물면서 단지 내에 있는 야외 온천장에서 천연 유황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놓은 휴양지이다.

일요일이라 손님이 많아서였는지 야외 온천장 바로 옆의 예약된 우리의 방갈로에 여장을 풀기까지는 체크인을 하고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숙소에 여장을 푼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온천장으로 향했다.

찌아터 스파 리조트 단지 내에 있는 야외 온천장.
찌아터 스파 리조트 단지 내에 있는 야외 온천장. ⓒ 정철용
이미 늦은 오후고 사람들도 거의 다 빠져나가서 온천장은 한적했다. 물이 제법 뜨겁고 유황 성분이 많아 눈이 매워서 물속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피부에는 효과만점이라고 하니 들락날락거리며 바로 옆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시켜 먹으면서까지 늦도록 온천을 즐겼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누이고 어둠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예전에 보았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가 생각났다.

영화 속 주인공 안드레이는 촛불 한 자루를 켜들고 이탈리아의 어느 야외 온천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간다. 촛불은 번번이 꺼지지만 그는 자신의 이 하찮은 행동이 정말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장을 가로질러 맞은 편 끝에 닿는데 성공한다. 바로 그 시각 세상의 구원을 외치며 한 미친 사내가 로마의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한다.

그렇다면 안드레이가 온천장에서 들고 갔던 촛불은 어쩌면 분신한 그 미친 사내의 생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성공과 미친 사내의 분신은 모두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는데, 과연 세상은 구원되었을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스탤지어> 포스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스탤지어> 포스터. ⓒ 무비스트
나는 고개를 흔든다. 미국 등 강대국의 이라크 침공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유혈 분쟁 등 최근의 지구촌 풍경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50년 전 반둥에서 선언된 세계 평화와 협력을 위한 평화 10원칙은 아직도 그 실현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머리로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내 몸은 뜨거운 온천물에 노곤하게 풀어진 채 무겁다. 짙어지는 어둠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을 누군가 가로지르는 것이 보인다. 촛불을 켜들고 가는 ‘그’가 ‘나’이어야 할 텐데, 내 몸은 여전히 뜨거운 온천물 속에 잠겨 있다.

반둥에서 한가롭게 유황온천을 즐기며 빈둥대는 나를 타르코프스키가, <노스탤지어>의 안드레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어둠 속 반둥의 밤하늘엔 별들이 참 많이도 떠 있다. 하늘엔 평화, 그러나 땅에서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 유황 냄새 속에서 나는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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