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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지수
창랑지수 ⓒ 정호갑
중국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책, <창랑지수>.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 씻는다. 세상과 홀로 동떨어져 꼿꼿이 사는 것보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흙탕물 튀기면서 산다는 현실주의 삶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오늘 중국인들의 현실 삶의 모습은 어떠할까?

하나. 굽힐 수는 있어도 펼 수는 없다

“사나이는 자기를 굽힘으로써 자신을 펴는 걸세. 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를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중국 사람이라면 이 굽힐 굴(屈)과 펼 신(伸) 두 글자를 마음속에 새기고 반복해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하네.”

주인공 지대위는 올곧은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양심의 논리에 따라 세상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세상은 양심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많은 갈등 끝에 결국 주인공도 양심의 논리를 버리고 생존의 논리를 좇기로 한다.

위생청장인 마수장의 끄나풀이 되어 양심은 뒤로 하고 철저하게 생존의 논리에 따른 삶을 산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최고의 자리인 위생청장의 자리에 오른다. 자기의 사상을 세상에 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굽힘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이제 권력자가 되었으니 자기의 개혁 사상을 펴야할 때. 바로 자기 밑에 있는 썩은 중간 관리 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자기의 개혁 사상을 잘 따라줄 것이라 믿고 위생청을 개혁하고자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기의 사상을 그대로 펼 수가 없다.

이미 중간 관리 계층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며, 여태껏 억눌림을 당해 왔던 아랫사람들조차도 중간 관리 계층의 짓눌려 주인공의 개혁 사상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한계에 부딪치자 ‘사람은 어느 산에 오르느냐에 따라 부르는 노래도 달라진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권력의 질서에 그대로 머물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굽힘의 질서에 익숙하고 굽힘의 삶이 펴는 삶으로 나갈 수 없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아직 굽힘의 시간이 더 필요한 만큼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서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둘. 하늘은 무너지지 않지만 개인은 끝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복종할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말 좀 하게 한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위생청장인 마수장이 곧잘 하는 말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이나 권력에 대해 비판의 말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권력에 도전하거나 비판하는 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주인공은 한 때 마청장의 눈길을 받는 기대주였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위생청에 대한 비판의 말을 했다 그대로 눈 밖으로 밀려나 좌천당하고 만다.

이러한 마청장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누구든 비굴해지고, 그에게 아첨을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눈에 벗어나면 모든 것이 거기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밑의 사람들은 그의 음성에서 그의 움직임에서 그의 속뜻을 찾아내기 위하여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감추고 권력에 눈짓과 몸짓을 읽어내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권력자에게 끊임없이 꼬릴 흔드는 개가 되어 그 대가로 던져지는 뼈다귀를 받아먹어야 한다.

‘밀가루 반죽은 빚는 사람의 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이 원칙이라는 것도 말로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회. 이 사회 역시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서기에는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셋. 관리들이 만들어내는 믿을 수 없는 숫자

“숫자가 관리를 만들고 관리가 숫자를 만들어내는 시대잖아요! 숫자는 곧 관리들의 생명입니다.”

관리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농촌에서 발명한 흡혈충 발병률의 숫자를 조작한다. 이 숫자의 조작에서 오는 안일한 태도, 그리고 위급함을 무시하는 태도. 하지만 현실은 숫자하고 관계없이 바로 우리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다가서고 만다. 이로 인해 농촌지역의 흡혈충은 나아질 수가 없다. 바로 이 조작이 사회 발전을 가로 막고 신뢰를 무너뜨린다. 얼핏 눈가림으로 급한 상황의 불은 끌 수 있겠지만 그 불은 반드시 다시 타오른다. 그 때 그 불은 모든 것을 삼키고 남을 것이다.

올 봄에 중국을 몰아친 사스 또한 통계 숫자의 조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애써 외면하고 숫자를 조작해보지만 사스는 온 중국을 휩쓸고 세계인들을 긴장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신뢰도에도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는가? 지금도 중국에서 말하는 통계 숫자에 대해 많은 국가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사회라면 이 역시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서는데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중국의 많은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도 사건보다 인물 중심이다. 양심의 논리와 생존의 논리에서 고민하다 결국 생존의 논리를 따라 양심을 버리고 권력을 잡는 주인공 지대위,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를 비판하는 무리들을 과감히 처단하는 마수장, 꼬리 없는 개가 되어 던져 주는 뼈다귀를 받아먹는 정소괴, 이들은 오늘의 중국의 현실에서 각각 상징을 띠고 있는 인물이다.

지대위를 중국의 개혁을 꿈꾸며 권력을 잡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은 인물로, 마수장은 지난날 절대 권력을 휘어잡은 실력자로, 정소괴는 권력에 빌붙은 인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성에 꼭 하나의 인물을 떠올리기 위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중국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서라도 마주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은 세계로 나왔다. 중국에서 몇 개월 지내다보니 이 세 가지의 잘못된 중국의 현실에 공감이 간다. 허나 비단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이제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세계무대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되길 바란다.

창랑지수 1

옌쩐 지음, 박혜원 외 옮김, 비봉출판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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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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