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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장철영
10월 30일 여의도 열린우리당사에서 만난 이경숙(50)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동안 여성 운동 현장에서 '여성연합 상임대표'라는 여성계 대표 인사로 막역하게 취재를 해 오던 입장에서 27일 여당으로 급부상한 신당의 태동을 책임질 공동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 일약 주목을 받게 된 '정치인 이경숙'을 만난다는 것은 '참신한' 충격이었다.

운동가 '이오경숙'에서 정치인 '이경숙'으로

"공동대표를 하면서도 '이오경숙'이란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계속 하겠느냐"란 다소 짓궂은 질문에 "여성 운동을 할 때는 상징적 의미에서 '이오경숙'을 썼지만, '준비위원장'이 법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상 정당 등록 시를 생각해서라도 본 이름인 '이경숙'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단호한 어투에서 그의 입장 변화를 단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이오경숙'이란 진보적 여성 운동가의 자리에 '이경숙'이란 정치인이 새로 들어서서 운동 현장에서의 이상향을 조율해 정치권에서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시킨다? 꽤 기대를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편으론 당무위원 격인 중앙위원으로 함께 참여하는 '손이덕수', '고은광순' 등 열혈 여성 운동가들과 (한때 그들처럼 양성을 함께 썼던) 그가 어울려 만들어 갈 열린우리당의 미래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27일 열린우리당 합류를 계기로 여성연합 대표직을 사임한 것으로 아는데, 여성계 내부에서의 논의 과정과 반응은 어땠나?
"여성연합 대표직뿐만 아니라 일체의 시민 운동 단체 직분을 정리하고 있다. 조직적으로는 아니지만 기회가 닿으면 2004년 총선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여성' 입장을 대변해 줄 사람이 들어가야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정치 개혁이 된다고 말해왔다. 개인적으로 지인들에게 의논해 보면 일찍 들어가야 한다, 옛날처럼 다 결정이 된 후 (손쉽게)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처음부터 들어가서 같이 고생하고 그래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성단체연합 대표직 등 시민 단체 직분 정리

그는 '공동대표'격인 '공동위원장' 제의가 왔을 때 "마지막까지 가능한 한 안 들어가려 했지만, 안에 계신 분이 잘못하면 '여성 몫'이 공석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열린우리당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느냐 해서 발표 직전인 26일 같이 여성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개인적으로 마지막 결단을 했다"고 한다.

ⓒ 우먼타임스 장철영
-여성 단체장이 정치권에 나가는 것과 관련한 여성연합의 내규는 개정됐나?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규는 지난번 이사회때 개정됐다. 11월 6일 이번 이사회때 '내가 (정치 진출을) 하겠다'라고 말하고 6일 이사회 이후에 우리당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그것이 (대통령 재신임 정국으로 창당이 앞당겨지면서) 한 2주 앞당겨진 것이다."

여성연합은 2000년 '임원이나 실무자로 있을 동안에는 정치권에 진출할 수 없다'는 자체 내규를 만들었다가 지난 9월 이사회에서 '임기중이라도 3개월 전에 사퇴하면 선거에 나갈 수 있다'고 내규를 고쳤다. 그러나 이 대표의 이번 정계 진출은 여성연합 내부 관계자들에게도 갑작스러운 것으로 내부에서 적지않은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여성연합은 남은 공동대표 2인 중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가 직무대행을 맡고 있고 내년 1월 총회에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배경은 무엇인가.
"(정치권으로)가게 되면 여기로 올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다. 한나라당은 힘은 있지만 개혁적 의지가 없고, 민노당은 굉장히 개혁적이지만 아직 원내에서는 힘이 없고…. 여성들의 꿈,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정치권 내에서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열린우리당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꿈 실현할 수 있는 곳, 열린우리당이란 믿음

-우리당 중앙위원 151명 중 여성은 30%가 채 되지 않는 26명이다.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당초 준비 모임에서 중앙위원을 100명을 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30%에 해당하는 30명을 여성으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중에 150명으로 늘어나게 됐고 여성풀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지도부로 (여성이)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 당원수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기인대회 때 보니 전체적인 연령층은 젊어졌는데 여성 수는 줄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의 정치개혁안 논의 중 여성 관련 사항으로 다른 당들도 잠정 합의한 '비례대표 50%, 지역구 30% 여성 할당' 이외에 무엇이 있나.
"지역구의 경우 완전 경선제일 경우 여성들에게 불리해서 20% 가산점을 주기로 정했다. 가산점을 30%로 하지 않은 것은 30%를 할 경우 남성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불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여성전용 선거구제는 다른 정당들도 합의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모두 합의하면 여성전용 선거구제 제안을 받을 생각이 있다고 한다. 당이 정식 창당된 후 11·12월에 여성 아젠다로 정식으로 제안할 수도 있다."

그는 창당준비위와 개혁신당추진위 사이에 내홍이 있다는 식의 보도에 대해 "지도부 선출 방식, 당직 배분 방식, 지구당 경선 문제 등에서 시각차가 있는 것 같다"면서도 "민주적인 것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고, 시끄러운 것이 과도하면 문제지만 이를 못 참는 것도 문제"라며 언론 보도를 꼬집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당이 똑같이 다 밝혀야 한다. 특검 같은 형식은 안 되고, 검찰이 다 드러내 놓고 밝히고 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현명한 국민들이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 우먼타임스 장철영
정치 개혁·양성 평등·한반도 평화에 전력

-운동과 정치는 다르다. 그 동안의 여성 운동 성과를 정치권에 어떻게 가져올 계획인가?
"시민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와 목소리를 직접 내는 것은 물론, 정치권에서 관철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우선은 여성 국회의원들이 많이 나오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당론과 당 정책에 호주제 폐지나 파병 문제 등 시민 사회 현안과 가치관이 올바른 방향으로 잘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치 입문하면서 정치 개혁, 양성 평등, 한반도 평화 실현 이 세 가지를 (정치 활동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는 여성 운동보다 (발전) 속도도 느리고 성과도 더 늦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웃음)."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상당히 조용하신 편이다. 영부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새로운 영부인상을 모색할 때다. 영부인께서 복지나 교육 중 특정 부분을 전문적으로 맡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자원 봉사라든지 책읽기를 좋아하신다니까 도서관 운동 같은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경숙 공동위원장은 대학 4학년인 아들과 3학년인 딸 남매를 두고 있다. 그는 "큰아이가 여성연합 자원 봉사를 하면서 엄마의 일을 근거리에서 봐와서 그런지 '정치'하는 것도 괜찮다고 하고 이번에 공동위원장직을 맡은 것을 "대단하다"고 말하기도 하더라"며 웃었다.

반면, 전북 김제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할 것이라고 알려진 남편 최규성 국민정치연구회 사무총장에 대해선 한사코 '노코멘트'를 고집했다. 여성 운동가에겐 그 자신이 중요한 것이지 남편 등 주변 사람들이 왜 고려돼야 하느냐면서. 그는 단지 "남편은 아직 (정치를 할지, 사업을 계속 할지)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경숙 공동위원장 프로필

이경숙 공동위원장은 20년 여성 운동 이력의 소유자다.

놀랍게도 학창 시절엔 운동권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범생이'였으며,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OB그룹 사보 편집기자로 3년간 일했다. 이때의 체험이 그를 여성 운동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퇴직 각서제를 아무 의식 없이 쓰고 입사했던" 그지만 출근하자마자 남자 직원들 의자엔 팔걸이가 있고, 여직원들 의자엔 팔걸이가 없는 '차별'이 눈에 띄었고, 여직원들에게 당연시되던 '책상 닦기' 관행이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그래서 실장과 담판을 지어 수고비를 더 준다는 조건으로 청소부가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남자 직원과의 호봉 체계에서 오는 월급 차이를 임시 사보 활동비를 여직원에게 주는 조건으로 메워나갔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우리 선배들은 직장에서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해줬나'란 회의와 함께 '단계적으로 해나가자'란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직장 생활을 통해 여성학을 '눈'으로 공부했기에 여성 운동을 이제까지 할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그의 또 다른 인생 전환기는 타계한 친일문학 전문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접하면서 왔다. '지도자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모두 친일을 했구나'란 생각에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뤘고, 그 결과 '역사관이 철저히 정립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대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근대사를 전공했다. 이 과정에서 윤후정·장상·조형 교수 등으로부터 여성주의적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여성평우회 창립에 참여해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87년 여성민우회가 창립되자 또다시 사무국장으로 실무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여성민우회, 여성연합,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등 굵직굵직한 여성단체장을 역임하는 한편 언론개혁시민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 공동대표 등 '여성 몫'의 시민사회단체장 역할도 함께 했다. 이를 두고 그는 "83년부터 쉬지 않고 일만 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 우먼타임스 허용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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