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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밤 믿어 지지 않은 사망소식을 들은 청소년 공부방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굵은 눈물만 흘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밤 믿어 지지 않은 사망소식을 들은 청소년 공부방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굵은 눈물만 흘리고 있다. ⓒ 김유승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31일 밤 8시 목포시 창평동 신협건물 4층에 마련된 좁은 강의실 곳곳에는 어린 제자들의 흐느낌과 이를 달래는 선생님의 굵은 눈물만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서 근무하며 함께 공부방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동료교사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애들 잘 부탁한다'며 웃으며 갔는데 그게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며 "그는 공부방을 한번도 안 빠질 정도로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울먹였다.

이씨가 목포청소년공부방 대표선생님이 근무했던 이곳은 8년된 공부방으로 현재 직장인, 주부 등으로 구성된 11명의 선생님과 20여명의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동료교사는 "그렇게 힘들어도 화를 내지 않은 성격 때문인지 우리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며 "이 선생이 처음 공부방에 왔을 때는 선생님과 학생 수가 모두 적어 가장 어려웠다. 나중에 이 선생이 공부방 대표를 맡고 나서 동사무소를 직접 찾아다니며 부탁하고 일일이 학생들에게 전화를 해서 학생을 모집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며 이씨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인터넷 한겨레>에 글을 올려 감동을 일으킨 동료교사 배태준(31·공부방 5년)씨는 "그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알리는 노조 간부로서 책임감도 컸겠지만, 아마도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며 "아이들이 지금과 같은 비정규직이 난무하는 어려운 사회현실에서 살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더 그런 일을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용석 선생님이 어떤 야학교사 였는지는 인터넷 <다음> 카페 '목포 청소년 공부방(http://cafe.daum.net/mokpostudyroom)'에 올린 학생들의 글에서 묻어난다.

동료 공부방 선생님이 슬퍼하는 제자를 위로하고 있다. 청소년 공부방은 한주간 추모기간을 가진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동료 공부방 선생님이 슬퍼하는 제자를 위로하고 있다. 청소년 공부방은 한주간 추모기간을 가진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 김유승
분신 이후 만든 '이용석 선생님에게 하고픈 말' 란에 올린 나원석 학생은 "이제 곁에 안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더 높은 곳에서 지켜 보시는 거야, 옆에 없는 슬픔은 잠시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영원히 있잖아.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듯 용 석 선생님도 그런 것 뿐이야"라고 썼다.

'난이 용미'라는 학생의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선생님 아프신 것도 못믿던 저였습니다, 어제 공부방에서 그렇게 울고나선 이젠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효원샘 말대로 냉정해질지라도 선생님 생각은 나중에 하고, 제가 할 일 열심히 하면 선생님 돌아오실꺼라고, 그래서 오늘은 학교에서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러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오늘 선생님 수술 하시는데, 잘되셨겠지?그래 우리가 너무 보고 싶으셔서 빨리 돌아 오실꺼야. 자꾸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공부방 카페에서 선생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당연히 그 소식이 올라왔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본 순간 클릭을 하기가 겁이 나더군요, 병원에만 누워있기가 너무 답답했었나요? 저희 보려구 하늘로 가신건가요? 선생님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선생님만 저흴 볼 수 있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우리는 남은 우리는 선생님을 볼 수 없잖아요, 지금은 너무 슬프지만, 선생님은 영원히 저희들 가슴속에 살아 계실거란 걸, 그렇게 생각할께요. 사랑해요.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행복하시길…."

한편 이용석 선생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모인 목포 청소년 공부방 선생님과 일부 학생들은 장례식장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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