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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낮 12시 고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의 유서가 낭독되자 한진중 노동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지난 17일 낮 12시 고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의 유서가 낭독되자 한진중 노동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손배·가압류가 남편(배달호)으로써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해결된 게 없네요. 아까운 목숨만 끊고 있는데, 정부는 이제사 대책을 추진한다고 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올해 1월 9일 창원 두산중에서 분신사망했던 노동자 배달호씨의 부인 황길영씨가 한 말이다. 황씨는 지난 17일 부산 한진중지회 김주익(41) 지회장의 자살사건이 터지자 세 차례나 현장을 찾아 유가족을 위로하기도 했다. 29일에는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녀가 이렇게 거리로 나서게 된 데는 남편의 유언을 따르겠다는 것도 있지만, 더이상 남편 같은 사람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했죠. 그 분들도 그랬고 저도 그랬는데, 도저히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죠.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왜 그랬는지를 이해할 것 같데요. 남편도 그랬고, 김주익 지회장도 그랬던 거지요. 막다른 골목에 처했던 겁니다."

2003년 겨울 초입,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죽했으면 죽음을 선택했겠느냐"는 말을 실감한다. 노조 간부나 노동자들은 자살과 분신을 결행하지는 않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고 느끼고 있다. 경영주는 손배·가압류에다 징계며 해고로, 사법기관은 수배와 구속으로, 언론 등 사회도 노동귀족으로 몰아부치기 일쑤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사용자 대항권' 등을 운운하면서 이렇다 할만한 노동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배달호씨 사건으로 손배·가압류 문제가 사회쟁점화가 되었지만 이제 와서 대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당장 손배·가압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 노동자들은 기댈 곳이 없다. 가정도 파탄이다. 손배·가압류를 견디다 못해 이혼까지 당한 노동자가 한둘이 아니다. 평생을 벌어도 갚지 못할 손해배상금액을 안고 있다.

노동계 "법과 원칙의 기준은 무엇인가"

손배·가압류는 노동자들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손배·가압류는 노동자들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노동계에서는 "법과 원칙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고있다. 정부와 사업주들은 '법과 원칙'을 강조하지만, 법의 잣대가 왔다갔다 한다고 노동자들은 보고있다.

고 배달호씨가 몸 담았던 창원 두산중공업도 마찬가지였다. 사측은 시도 때도 없이 '법과 원칙'을 강조했다. 지난해 47일 장기파업 때도 그랬고, 배달호씨 사건이 터졌을 당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노조측에서 올해 2월 부당노동행위와 관련한 갖가지 자료를 공개하자 사측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까지 매번 강조해왔던 '법과 원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회사측 한 관계자는 "우리 이제 그런 말 안 써요"라고 할 정도였다. 경영자들은 '법과 원칙'이라는 말로 '노동탄압'을 포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사법부도 기댈 곳이 못된다. 사법부도 경영주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금속노조 두산중지회 한 간부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사측은 수도 없이 고소고발을 일삼았는데, 노조측에서 온갖 탄원서를 다 받아 내도 소용이 없고, 회사가 고소고발을 취하하면 재판부는 그제사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노동문제에 있어 사측이 할 수 있는 법적 제재 수단은 많다. 쟁의행위금지 가처분신청에서부터 손배·가압류 등 다양하다. 사측에서 낸 각종 제재 수단에 대해 사법부도 즉각 반응을 보인다. 박훈 변호사는 "일반 민사소송에서 손배·가압류는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한 달은 걸리는데, 노동문제와 관련한 가처분 신청 등은 곧바로 결정을 내려버린다"고 말했다.

심지어 가처분 신청 하루만에 결정을 내버리는 사례도 있다는 것.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해 놓고 노조 간부가 회사에 출근하거나 노조 사무실에 출입을 하려고 해도 사측은 출입금지가처분신청을 내고, 법원은 곧바로 결정을 내버리기가 일쑤다.

아들 교통사고에도 가보지 못하는 수배 노동자

현 정권에서 노동운동으로 수배를 당하거나 구속된 노동자의 숫자는 역대 정권과 비교할 때 더 많다. 수배로 인한 고통도 이만저만 아니다. 가족한테 급한 일이 생겨도 돌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는 사례가 많다. 경찰에 쫓기는 신분에다 가족 걱정까지, 이러다보니 자포자기할 때가 많다.

한진중 특수선지회 차해도(45) 지회장은 지금 한진중 투쟁광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는 지난 8월 한진중 투쟁과 관련해 방위산업체에서 쟁의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수배에 걸려 있다. 그런데 지난 27일 늦은 결혼만에 얻은 8살 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릎이 함몰되어 더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아들이 입원한 병원은 영도다리만 건너면 되는 부산역 주변이다. 하지만 그는 수배자 신분이라 갈 수가 없다. 애를 태우던 그는 며칠 전 사수대 10여명을 조직해 밤에 몰래 아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올 수가 있었다. 차 지회장은 "늦게 얻은 아들이 대수술을 하는데도 가보지 못하는 처리"라며 "뒤에 아들로부터 무슨 원망의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대구지부 차차원 사무국장은 "노조 간부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해남 지회장이 세원테크 정문 앞에서 분신을 기도했던 것도 그런 절망감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는 "손배가압류 결정도 너무 쉽게 내려지고, 노조 간부의 회사 접근금지 결정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도 안 믿는다" 분노 섞인 비난 목소리

29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고 배달호씨의 부인 황길영씨가 참석했다. (위) 고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의 유족들은 상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 (아래)
29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고 배달호씨의 부인 황길영씨가 참석했다. (위) 고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의 유족들은 상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 (아래) ⓒ 오마이뉴스 윤성효
노동자들의 절망감이 더욱 큰 것은 '믿었던 정부'로부터 느끼는 배신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한때 노동자를 위해 변론까지 했던 인권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상황이나아지기는커녕 더 힘들어졌다. 노동자들은 집회 때마다 외치고 있다. "이 정권은 노동자를 죽이고 있고, 노동자를 개 취급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법률을 만든다!"

김창한 금속노조 위원장은 29일 열린 부산역 집회에서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에다 저임금 등으로 (노동계를) 철저하게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면서 "노동탄압의 수준을 넘어 사람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며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지난 22일 부산역 광장 집회에서 김주익 지회장의 추도사를 읽으면서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했다. "LNG선상 파업에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의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입니까?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봉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29일 정부는 손배·가압류의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노동계는 이 또한 믿지 않고있다. 그날 오후 부산역 집회장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노동자 분신과 자살사태에 대한 대책이라면 당장에 손배·가압류를 중단해야 할 것이며, 조금 있다가 재계에서 한 두 마디만 하면 또 자본 쪽으로 기울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003년 겨울 초입, 한국 노동자들은 기댈 언덕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래저래 정부도, 자본도, 사법부도, 언론도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노동자들은 "죽지 않아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총반격을 해야 하고, 노동자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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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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