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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벽잠을 깨운 것은 첫 빗방울 소리가 틀림없다. 늘여 낸 양철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돈 두렁 태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콩 볶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 기어이 비가 오는구나. 꼭 요럴 때만 일기예보가 들어맞는구나.’

또닥또닥 하는 빗소리가 만만해 보였는지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가녀린 빗소리가 만만해서만은 아니다. 어떻게 몸을 일으켜 창 밖이라도 내다보려고 했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두 눈은 몹시 따가웠고 양 눈에 눈곱이 꽉 끼어 눈이 뜨여지지 않았다.

두 번째 잠이 깬 것은 처마 끝에 달린 풍경소리 때문이다. 딩당둥동당 하는 요란한 소리에 잠이 번쩍 깼다. 저게 무슨 소린가. 한참 어리둥절했다. 풍경이 춤을 추는지 짧은 간격을 두고 같은 소리가 되풀이 되었다. 풍경이 왜 저러지? 뭐가 잘못됐지? 아니. 태풍인가? 한참을 헤매던 나는 겨우 첫 잠을 깨웠던 빗소리와 연결 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제일 먼저 떠 오른 것은 윗 밭에 깔린 채 남이 있는 들깨였다.
째려보기만 해도 깨알이 흘러내릴 지경인데 바람이 저렇게 불어대니 남아나겠나 싶었다. 한숨이 포옥 나왔다. 비에 젖으면 좀 덜 하려나? 요행을 바라는 내 마음이 애처로워 보였다.

연쇄 폭발하듯이 걱정이 밀려왔다. 반쯤 타작하다가 가빠로 덮어 놓은 콩 타작마당이 떠올랐다. 대나무 도리깨를 밭에 둔 채 그냥 왔다는 생각도 났다. 가빠로 덮는 작업을 새날이와 새들이가 했는데 제대로 잘 했을까? 바람에 안 날리게 잘 눌러두라고 일렀었지만 막상 바람이 불고 비가 오니 또 걱정이었다.

부랴부랴 챙이로 대충 까불어 담아 온 큰 들깨 대야를 처마 밑에 제대로 들여놓은 것은 안심이 되었다. 썰다가 깨대 옆에 두고 온 작두가 비에 젖어 녹슬지는 않을까. 가만. 카메라는 가져 왔던가? 어제 기어이 밭 한 뙈기에 우리밀을 다 심은 것은 기가 막히게 움이 틀 것 같았다. 지난주에 직파한 보리가 예쁘게 싹이 돋은 것도 떠올랐다. 낫도 그냥 두고 왔는데…. 낫이야 뭐 별일 없겠고 어두워서 못 찾고 만 우리밀 함지박은 무사할까? 걱정과 위안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걱정은 팔자일까? 비가 오면 짚신장수 큰아들 걱정, 날이 들면 나막신장수 작은아들 걱정에 주름살 펴질 날이 없던 노파가 산 속 스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스님은 쉽고도 어려운 해답을 주었다. 그 후로 노파는 비가 오면 나막신장수 작은아들 생각하고 햇볕이 나면 짚신장수 큰 아들 생각에 날이면 날마다 행복했다고 한다.

걱정은 애정과 관심의 반증일까? 어리석은 나의 새벽 걱정은 끝이 안 났다. 어제 밤 행사에 가지 말고 밭일을 다 끝낼 걸 싶었다.
‘아냐 그래도 최소한의 사람 도리는 하고 살아야지 밭일이 끝이 있겠는가.’
여성단체 대표인 어느 선배의 출판기념회가 있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시내로 가야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만약에 아침에 옆집 할머니가 밤에 비 온다는 얘기를 안 해 주었으면 어떡할 뻔 했을지를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 아닌가. 요즘은 날씨가 하도 좋아서 일기예보를 등한시하며 지내 왔었다.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여전한데 번개가 번쩍 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는지 번갯불과 동시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비스듬하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한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이때 분신한 노동자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세상을 창백한 모습으로 환하게 한눈에 드러내 주고 사라진 번갯불이 뜻하지 않게도 어제 잠들기 전에 본 뉴스의 분신노동자를 떠오르게 했다. 타서 허옇게 살갗이 드러난 사진이 내 몸뚱아리를 쪼그라들게 했었다.

뉴스는 끔찍했다. 십 수 년 전 여러 차례 봐 왔던 분신자살한 시신들이 떠올랐다. 기름을 몸에 끼얹고 불길에 휩싸여 살은 타 들어가고 연기에 숨이 막혀 외마디 비명으로 쓰러졌을 비정규직 노조간부는 이렇게 걱정 많은 새벽녘 내 잠자리로 찾아왔다. 오죽 발길 내 디딜 곳이 없었으면 어둠 속 이 한적한 산골 마을까지 내게로 왔을까 싶었다.

병원으로 옮겨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그 노동자를 가만히 가슴에 껴안았다. 비는 더 굵어지고 뇌성번개는 쉴 새 없이 으르렁댔다. 마루에 있던 바가지가 나뒹굴어지는지 퉁탕거렸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새벽 내내 나는 뒤척였다. 옆자리에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새들이 이불을 한손으로 덮어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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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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