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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이영애)의 저고리를 유심히 본 시청자라면 의문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작은 매듭으로 되어 있는 장금이의 저고리 앞고름은 오늘날 한복에서 볼 수있는 고름과는 어딘가 차이가 느껴진다.

▲ 20세기 수저고리(위) / 어린이 자수색동저고리(아래)
ⓒ 김상욱
지난 2일부터 12일까지 서대문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저고리 600년> 전시회를 보면 이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 고증을 바탕으로 재현해낸 저고리 60점에서 저고리의 변천사가 한 눈에 알 수 있다. 저고리는 고구려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의(衣)문화에서 그 역사가 깊다.

이번 <저고리600년> 전시회는 익산 원불교역사박물관(10/16-26) , 동해시 문화예술회관(11/13-19)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전시된다.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저고리를 재현해낸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 선생(47)의 노력이 엿보이는 전시회이다.

▲ 16세기 저고리. 큼직한 모습이 왠지 투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 김상욱
기녀들의 영향받아 저고리 짧아져

조선 초기 저고리 길이는 허리정도까지 오며 품은 넉넉하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매는 길다. 아울러 깃과 동정도 넓다. 전체적으로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쌀자루의 모양이 연상된다. 오늘날 '곡선미의 상징'인 저고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조선중기에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저고리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길이가 허리에서 가슴 아래까지 급격히 줄어든다. 품도 줄어들고 소매도 신체의 팔길이에 맞게끔 짧아진다. 작고 짧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인 상박하후(上薄下厚)의 복식미가 완성된 것이 바로 이때인 것이다.

▲ 18세기 삼회장저고리. 저고리길이는 허리아래까지.
ⓒ 김상욱
19세기말에 이르면 저고리의 길이는 극도로 짧아져 한뼘이 조금 넘는 저고리까지 등장한다. 옷감 부족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게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기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저고리도 섹시해졌다고나 할까? 점잔을 피우면서도 자기 할일은 다 하는(?) 영화 <스캔들>의 '조원'이 떠오른다.

그러나 20세기, 사회활동이 활발한 신여성의 등장과 함께 불편한 작은 저고리는 다시 길고 넉넉하게 변화한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대장금>의 장금이의 작은 앞고름처럼 장식의 의미가 강해져 길고 화려해진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저고리의 일반적인 모양새이다.

금박무늬는 조선시대의 '럭셔리'

저고리의 변천사 못지않게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소매 끝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환이 가능한 거들지를 붙인 저고리. 세탁하기에 불편한 사실을 생각하면 실용적인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였다. 늘 깨끗해보이고 싶은 마음도 담겨있는 것은 아닌지?

▲ 20세기 금박무늬의 삼회장저고리
ⓒ 김상욱
더운 여름에 주로 입는 적삼. 당시에는 아무리 더운 삼복더위라 하여도 반드시 속적삼을 받쳐입었다. 또 겨울에는 속적삼 위에 속저고리와 겉저고리를 입었다고. 모시로 만든 분홍적삼은 주로 새색시들이 입었던 것이라고 한다. 시집살이에서 속시원하라고 한겨울에도 모시적삼을 입었다니 당시 시집살이가 많이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 결혼을 한 사람은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었다. 자주색고름은 남편이 있는 부인, 남색끝동(소매끝)은 아들이 있음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금박무늬는 왕가, 귀족들이나 새길수 있었던 문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럭셔리'를 상징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양반이 급격히 늘어나는 조선후반에 가면 일반인들도 금박무늬를 옷에 새길수 있게 됐다.

저고리가 급격하게 짧아지면서 속살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인네들은 치마허리를 둘렀다. 젖가슴이 드러나면 대단히 부끄러워하는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 젖가슴은 다복(多福)과 다산(多産)을 상징했다. 때문에 과감했던 미니저고리(?)의 등장도 가능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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