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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아침 출근 시간에 불쾌한 일을 두 번씩이나 겪었다. 출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서는 집 앞 육교를 건너야 하는데 요즘 들어 경찰의 불심검문이 실시되면서 얼굴을 붉혀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심검문 첫 날, A씨는 육교 계단을 올라섰다가 바쁜 발걸음을 멈췄다. 정복차림의 경찰 여럿이 오가는 사람을 상대로 검문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경찰만 보면 왜 주눅이 들까.' A씨는 자신의 행동을 씁쓸해하며 그 이유를 대학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 탓으로 돌렸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경찰 앞을 지나는 순간, A씨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다가선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 것이다. 경찰의 '레파토리'는 대학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잠시 불심검문이 있겠습니다. 신분증 좀 제시해 주시죠." A씨는 "네" 소리와 함께 황급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

무전기로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A씨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 바쁜 시간에 내가 왜 여기 멈춰 서있어야 하는 걸까.' 경찰로부터 주민등록증을 건네 받고 가던 길을 재촉하면서 A씨는 항의조차 못한 자신이 몹시도 원망스러워졌다.

A씨는 다음날 아침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 날 아침에도 경찰이 그곳에서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 경찰 앞을 지나가려던 순간, 이번에도 여지없이 경찰이 A씨를 불러 세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렇지만 A씨는 벌써부터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맘을 먹고 있었다.

"아니, 어제도 신분증을 보여줬는데 오늘도 또 줘야 합니까?"
"글쎄요. 어제는 제 근무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이유가 뭡니까. 제가 범죄자처럼 생겼나요?"
"그런 것은 아니고, 일제단속 기간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제 신분증 보기 전에 우선 경찰 아저씨 신분증부터 보여주세요."
"정복을 입은 경찰한테 신분증을 보여달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야 경찰 아저씨 사정이고, 저 또한 바쁜 아침시간 사정 봐주지 않았잖아요!"

A씨는 급기야 경찰과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찰은 A씨를 붙잡고 있어봤자 별 무소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가라고 했다. 그리고 바람소리가 나도록 뒤돌아서는 A씨의 뒤통수로 경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도 그러시면 공무집행방해에 해당됩니다." A씨는 뜨끔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고개를 돌려 경찰을 한껏 노려본 뒤 빠르게 전철역으로 향했다.

불심검문, 거부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A씨와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만큼의 사회 민주화를 누리기까지 개인은 국가로부터 무수한 인권침해를 당해왔고,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A씨가 당한 인권침해는 현행 '경찰관직무집행법'에도 크게 위배된다. 이 법에 실려있는 불심검문 조항을 보자.

제3조(불심검문)
① 경찰관은 수상한 거동 기타 주위의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또는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다.
② 그 장소에서 제1항의 질문을 하는 것이 당해인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질문하기 위하여 부근의 경찰서, 지서, 파출소 또는 출장소(이하 '경찰관서'라 하되, 지방해양경찰관서를 포함한다)에 동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당해인은 경찰관의 동행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개정 1988. 12. 31, 1995. 8. 8)
③ 경찰관은 제 1항에 규정된 자에 대하여 질문을 할 때에 흉기의 소지여부를 조사할 수 있다.
④ 제1항 또는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질문하거나 동행을 요구할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하면서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그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여야 하며, 동행의 경우에는 동행장소를 밝혀야 한다. (개정 1991. 3. 8)
⑤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동행을 한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의 가족 또는 친지등에게 동행한 경찰관의 신분, 동행장소, 동행목적과 이유를 고지하거나 본인으로 하여금 즉시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여야 하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하여야 한다. (신설 1988. 12. 31)
⑥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동행을 한 경우 경찰관은 당해인을 6시간을 초과하여 경찰관서에 머물게 할 수 없다. (신설 1988. 12. 31, 1991. 3. 8)
⑦ 제1항 내지 제3항의 경우에 당해인은 형사소송에 관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신체를 구속당하지 아니하며, 그 의사에 반하여 답변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신설 1988. 12. 31)


A씨를 불심검문한 경찰은 당시 경찰 정복 차림이었던 관계로 굳이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속과 성명, 그리고 검문의 목적과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A씨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대상자 선정 기준'은 매우 개인적인 판단 기준에 근거하고 있어 언제든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높다.

따라서 A씨는 당시 경찰의 행위가 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불심검문을 거부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소시민'이 경찰에 대항해 권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같은 경찰의 불심검문은 말시비 끝에 폭력사태를 부르기도 한다.

▲ SBS가 촬영한 당시 상황의 한 장면
ⓒ SBS
실제로 지난 8월 30일 저녁 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전해투) K모 조직국장은 귀가 길에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불응하다가 경찰과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K국장은 S모 경장의 얼굴을 가격해 현재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K국장은 당시 경찰이 검문의 목적을 밝히지 않아 이에 불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사태에 대해 대법원이 지난 1992년 5월 공무집행방해와 관련해 내린 판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법원은 당시 경찰이 경미한 범죄(법정형 5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해당)의 현행범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진 것과 관련해 "형법 제136조가 규정하는 공무집행방해죄는 공무원의 직무집행이 적법한 경우에 한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여기서 적법한 공무집행이라고 함은 그 행위가 공무원의 추상적 권한에 속할 뿐 아니라 구체적 직무집행에 관한 법률상 요건과 방식을 갖춘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러한 적법성이 결여된 직무행위를 하는 공무원에게 대항하여 폭행을 가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를 공무집행방해죄로 다스릴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우리는 도심의 길 위에서 오늘도 일반 시민과 별 다를 바 없는 경찰관들을 만난다. 그들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에 따라 '공공의 안녕'을 위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38구경 권총을 차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 이제 그들로부터 받아온 주시의 눈길을 국민들도 돌려줄 때가 됐다.

"나는 경찰관을 이유 없이, 또 마구 때리지도 않았다"
K국장, SBS 상대로 언론중재 신청

▲ ⓒYTN
불심검문에 불응하다가 경찰과 물리적인 충돌을 빚은 K모 민주노총 전해투 조직국장 사건은 사건 발생 다음날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또다른 왜곡을 낳았다.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면서 경찰의 발표만을 그대로 인용했고, 이로 인해 한 노동자가 정당한 법 집행에 나선 경찰관을 '마구' 때린 것으로 묘사됐다. 언론은 또, K국장이 불심검문에 응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SBS는 사건 다음날인 31일 아침 종합뉴스 시간에 <민주노총 직원, 검문하던 경찰관 폭행> 제하의 보도에서 "차량을 검문한다고 해서 경찰관을 때린 혐의" "S경장을 때려 치아를 부러뜨린 혐의"라며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다.

YTN도 당일 뉴스에서 "경찰관을 마구 때린 혐의"라고 보도했고, KBS는 저녁 9시 뉴스 <잇단 경찰관 폭행, 공권력 추락 심각>에서 동영상을 보여주며 "(K국장이)경찰관 머리를 내려칩니다"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K모 민주노총 전해투 조직국장은 당시 상황을 촬영해 방영했던 SBS를 상대로 지난 9월 25일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을 제출했다. SBS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당일 촬영된 영상을 경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다음은 중재신청서에 실린 K국장의 중재신청 이유이다.

"TV뉴스에 나온 동영상을 보면 마치 때린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검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검문에 불응하자 경찰이 강제로 차를 멈추게 했고, 이에 항의하면서 서로 욕설이 오가던 중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경찰의 모자를 내리치게 된 것이 마치 때린 것처럼 잘못 보도된 것입니다.
동영상 자체에도 위에서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되어있는데 이와 관련한 다른 방송의 기사에서는 '경찰을 마구 때린 혐의로' '경찰관 머리를 내려칩니다'라고 왜곡되었고, 검찰수사기록(공소사실)에는 동영상과는 다르게 주먹을 써서 때렸다는 사실로 조사됐습니다.

저의 경우 경찰의 부당한 검문요구를 거부하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시 검문하던 S모 경장이 '이빨이 부러졌다'면서 연행하라고 하여 구속되어 기소된 것인 데 보도에서는 '노동자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 맞은 것이 아니라 모자가 맞았다는 것이고 검·경찰의 수사기록처럼 이빨이 빠지거나 금이 간 것이 아니고 두 이빨을 묶기 위해 라미네이트라는 보철재를 씌웠는데 그 반쪽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진단서를 발급한 의사와 통화해 본 결과 상태는 경미했고 이빨 전체는 약간 흔들리는 상태였다고 합니다(의학전문 용어: 아탈구 상태).

이는 사건의 내용이 과장된 것으로, 결국 현행범이 아니 이상 검문에 불응할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저의 검문불응은 잘못된 것이고 경찰의 강압적인 체포와 연행 그리고 검찰의 공소는 정당한 것으로 왜곡된 것입니다.

저는 부당하게 강압적으로 검문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상황에서 언론이 사실관계를 따져보지 않고 성급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사건이 증폭되었고, 더구나 검·경찰에서 방송된 동영상자료를 유리하고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하고 있어서 결국 언론보도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게 되어 언론중재를 요청하게 됐습니다. 만약 불심검문에 대한 인권시비 등 사회문제인 시각을 염두에 두었다면 동영상자료도 불심검문을 강요하는 전반부 화면을 공평하게 내보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 이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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