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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사적 137호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사적 137호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1.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부를 흐르는 한강의 관문이자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엇보다도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강화도는 원래 한반도 마식령산맥의 김포 반도에서 이어진 내륙이었으나, 오랜 세월의 침강으로 내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섬이 되었다. 그 뒤 한강과 임진강의 퇴적 작용으로 다시 김포 반도와 연결되었으나 염하(鹽河 강화해협)가 한강에서 분류되어 머리 부분을 침식, 물길을 이루면서 하나의 섬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도와 서울과의 거리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35리인데, 옛 사람들의 걸음으로 치면 하루 반쯤이 걸릴 거리이고 배를 타는 시간까지 따지면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이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로가 발달함으로써 강화도는 날로 서울과 가까워 졌고, 특히 강화도와 뭍을 잇는 강화대교가 놓인 1970년 정월부터는 서울까지 왕복 반나절 길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은 <조선사학회>의 ‘고적’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이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강화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요즘 와서 서울과 강화가 그토록 가까워 졌다는 사실은 자칫하면 강화가 더는 그 강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아낸다.

전등사 약사전
전등사 약사전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모든 특징은 이곳이 섬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데 다리가 놓이고 뭍과의 왕래가 수월해진 뒤로부터 적어도 강화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강화는 더는 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에서 강화로 가는 48번 국도가 문수산의 남쪽 뿌리께에 있는 강화대교의 김포 쪽 입구에 다다르면 버스는 우선 멈춰 서서 형식적인 검문을 받는다. 그 틈에 창밖을 내다보면 좁은 물길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 땅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2.
삼국 시대의 이곳은 고구려 땅으로 그 이름이 갑비고차였다. <대동지지> ‘강화부’편의 ‘진도’조에는 갑곶진을 곧 갑비고차진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갑곶이란 이름은 이 갑비고차가 변해서 된 말인 듯하다. 고구려 때 혈구군이라고도 불렸던 강화도는 통일 신라 경덕왕 때에 해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원성왕 때에 혈구진이 세워진 섬이다. 이 섬은 고려 초에 그 이름을 강화로 고치면서 현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가 역사의 터로 등장한 때는, 1232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고려의 왕실과 조정이 이곳으로 옮겨오고 난 뒤부터 이거니와 그때로부터 사십년 동안 이곳은 고려 왕조의 도읍 노릇을 하였다.

이 나라를 침략한 몽고 사람들이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이어서 바다를 두려워했으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이 점을 노려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실제로 여섯 차례나 침입해 온 몽고군은 한눈에 건너보이는 그 좁은 물길을 끝내 건너지 못하고 김포 장애서 주춤주춤 말머리를 돌렸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강화유수부 이방청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고려사>에 따르면 그때에 개경의 호구는 거의 십만 호에 이르렀다는데, 조선왕조 후기에 한성 인구가 이 십만 명 안팎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가구 수라기보다 인구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십만 명쯤 되는 개경 사람들이 강화도로 옮겨갔으니, 지금 강화도의 인구가 거의 십만 명이 조금 넘는 것을 생각하면 그때의 강화도 형편을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강화도로 피난한 고려의 왕족과 귀족들은 강화도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개경의 것과 같은 모양의 궁궐을 짓고, 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뜰인 구정을 이루고 절을 지어 송도의 것을 그대로 따른 이름을 붙였으며, 사대문과 사소문을 갖춘 성곽을 세 겹으로 쌓았다.

지금은 강화읍의 북쪽 송악산에서 남산으로 뻗어 읍내를 둥그렇게 감싼 부분만 남은 내성은 처음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그 둘레가 3,874자였고 지금의 강화읍과 선원면 일대를 둘렀다. 또 풍수설을 따라 세자궁인 이궁과 임시궁궐인 가궐을 지어 나갔으니 화도면 홍왕리에 있는 북원 곧 마리산 남쪽에 남아 있는 궁터는 바로 그때 지어진 이궁이 있던 자리다.

강화도 임시정부는 뭍의 백성들에게 바다의 성이나 산성으로 피난하도록 일렀다. 그리하여 섬과 산성은 피난한 농민과 천민들이 몽고군과 싸우는 기지가 되었다. 백성들의 저항이 완강하자 몽고군은 평야의 곡식을 불사르는 전술을 썼다. 이렇게 해서 백성의 힘이 다하여 산성이 무너지자 몽고군은 잔인한 살육을 감행했다.

강도지도(해동지도) 1750년대 초. 이병도 소장
강도지도(해동지도) 1750년대 초. 이병도 소장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특히 마지막 침입이었던 1254년의 침입 때 그들이 끼친 피해는 형언할 수 없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만도 이십만 명이 넘었고, 몽고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재가 되었다. 인구는 줄고 땅은 황폐해 갔다. 또 경주에 있는 황룡사의 구층탑과 대구에 있는 부인사의 대장경 같은 귀중한 문화재도 불타버렸다.

그러자 강화도에서는 열여섯 해에 걸쳐 불타버린 부인사의 대장경을 대신하는 대장경 경판을 다시 만들어 냈다. 국보 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81,258장의 고려 대장경 판각이 그것인데, 목재로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쌨다. 이 나무를 삼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소금물에 삶은 다음에 오랫동안 그늘에 말려 널빤지로 켜고 대패로 다듬어 글자를 새겼다. 그 위에는 다시 옻칠을 하여 썩지도 않고 좀이 슬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 기술과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했던 뜻이야 갸륵했으나, 이는 말하자면 그때 조정의 ‘딴 짓거리’를 잘 드러내 준 셈이다. 불공이야 따로 부지런히 드리더라도 그런 물질적 정성은, 그때로서는 마땅히 몽고군에 맞선 힘을 키우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쏠렸어야 했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든 경비가 마침내 풀을 뜯어먹으며 끼니를 때우던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인 조세와 공물로 메워졌으니 말이다.

정제두 묘 문인석
정제두 묘 문인석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강화 천도(遷部) 무렵에 고려청자의 독특한 기법인 상감술이 가장 발달했다는 사실이나, 세상에 알려진 고려자기 중에서 많은 것이 강화도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도 속사정을 따지고 들면 고려 귀족들의 사치스런 행각에서 빚어진 것이다.

3.
사십년 동안에 걸쳐 고려의 임시 수도로서 크게 번성하던 강화도는, 고려 정부가 원이라고 나라 이름을 세운 몽고에 항복하자 다시 이에 반대를 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삼별초군에 점령되었었다. 그리고 이 삼별초군이 그들의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면서 조정에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화니 기물 따위를 몽땅 싣고 가고, 그 뒤를 이어 드디어 이 섬에 들어온 몽고군이 모든 시설을 불살라 버림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땅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2대 인조 때에 연거푸 후금-뒤에 청이라고 나라이름을 고쳤다-이 침략해 왔을 때에 조정에서 강화도로 피난하고 이곳 방비에 힘쓴 것도 뭍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한 뼘밖에 안 될 염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병자호란 때에 이 천연의 요새는 무너져 버렸다.

아무튼 강화도는 조선 시대에도 그토록 중요한 국방의 요새였으나 영조 때부터 수도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 일고 임금도 이에 동조하더니 정조 때에 와서 ‘도성 고수책’이 마련됨에 따라 이 섬과 이 섬 안의 모든 시설물들은 점차로 등한시하게 되었다.

연무당 옛터
연무당 옛터 ⓒ 박철
4.
그렇지만 강화도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한말에 이르러 신미양요가 일어난 곳이 되었다. 강화도의 관문 염하로 1871년 저들의 배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이 물목은 조선 왕조가 시작되고 나서 외국 선박이라면 오백년 동안 섬겼던 중국의 배조차도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던 곳이었다.

게다가 1866년 9월에 이곳 물목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프랑스 배 세 채가 영종도 앞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 제2한강교가 놓인 서강의 양화진 언저리까지 올라왔던 일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더욱 더 이 물목의 수비에 힘을 쏟게 했다.

프랑스군들의 명분이야 그 해 정월에 일어난 병인사옥 때에 그들의 선교사 아홉과 이 나라의 천주교 신자 8천 몇 명을 죽인 것에 대해 항의를 하고 조선에 남은 선교사 두 명을 구출한다는 것이었지만, 조선 정부로서는 그 험한 염하를 당당히 지나쳐 온 그들의 속셈을 우선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나라까지 넘보려는 수작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군은 다음날에 다시 배 7채를 거느리고 나타났는데, 이때 강화부는 점령당하여 한달이 넘도록 프랑스 군대가 주둔했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무기, 양식, 금괴와 은괴, 보물, 사고의 책들을 노략질 당했다.

이 사건으로 그때 집권자였던 대원군은 더욱 더 쇄국 정책을 고집하게 되었는데 다시 다섯 해 만에 이른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새로운 통상의 문호를 열 것을 요구하고 염하로 들어선 미국 전함 3채가 손돌목에 접어들어 광성보의 흙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갑자기 거의 이백 문이 넘는 대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조선군의 총포는 그들의 것에 견줄 바가 못 되었다.

강화읍성 서문. 첨화루
강화읍성 서문. 첨화루 ⓒ 박철
이 사건으로 조선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미군은 오로지 3명만이 죽었을 뿐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대원군은 고종으로 하여금 “만약 ‘화’를 말하는 자 있으면” 즉, 바깥 오랑케와 사귀자는 놈이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교서를 내리게 하고 나라의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렇던 조선이 1875년 발생한 운양호사건, 이는 일본군이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 가까이까지 저들의 군함 운양호를 끌고 왔던 일이다. 초지진과 지금 옹진군 영종도에 있던 영종진을 파괴하고 뭍에 올라와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던 사건에 이어 그 이듬해에 강화부 군사의 훈련처였던 연무당에서 겨우 10여년 전에 개국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개국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의 복잡한 국내 사정의 변화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민족 비극의 실마리가 되었다.

5.
이처럼 많은 큰 사건이 이 작은 섬에서 터졌으니 강화가 ‘눈물의 섬’ 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다. 고려 때에는, 개경환도에 앞서 무인정권이 무너지면서 또 삼별초가 강화도를 휩쓸면서 빚어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그만두고라도, 그 뒤로는 왕족과 권신의 유배지가 되고 나서 강화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뿌린 피눈물로 적셔졌다. 특히 고려 말에는 열 네 살 난 충정왕과 아홉 살 난 창왕이 이 곳으로 쫓겨 왔다가 살해되었고, 우왕은 다시 강릉으로 쫓겨 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이런 비극이 더 크게 더 자주 일어났다.

성공회 강화읍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
성공회 강화읍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 ⓒ 박철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사건 때에 쫓겨난 안평 대군이나 광해군 때에 일어난 능창군 추대 사건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가 쫓겨난 능창 대군이 이 섬에서 귀양살이를 한 사실이 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참혹하게 이 섬으로 쫓겨 오거나 이 섬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8살에 이 섬에 보내진 영창 대군은 밀실에 갇힌 채로 밖에서 때는 불에 타죽었고, 그 짓을 시킨 광해군 자신도 그 마누라와 함께 이 섬에 귀양을 왔다. 그의 아들은 교동도에 보내졌는데 제 아비가 보고 싶어 옥 안에서 굴을 파나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다 들켜 죽음을 당했으며 이 아들의 부인은 옥 속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섬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 연산군은 교동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가 갇힌 집에는 해를 볼 수 없게 울타리를 치고 다만 창 하나만을 내어 그리 음식을 주거나 말을 전해 주었다. 뒤주 대왕인 사도 세자의 아들 중에서 은언군이 이복형인 정조의 명령으로 이 섬에 옮겨와 살았다. 농사를 짓고 평범하게 살던 그도 끝내는 모함으로 살해되었는데 은언군의 손자가 ‘강화 도령’인 철종이다.

5.
뭐니 뭐니 해도 강화하면 인삼과 화문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강화에서 인삼이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뒤부터라고 한다. 이곳은 남쪽으로 피난 온 개성 사람들이 이곳에 인삼을 심기 시작하면서 인삼의 산지가 되었다. 예로부터 인삼 재배의 조건은 기름지지도 않고 척박하지도 않으며, 건조하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으며, 양지바르지도 않고 그늘지지도 않는 것 세 가지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조건 때문에 강화는 김포군 과포천군과 함께 전매청이 지정한 6년 근 재배 지역으로 꼽힌다.

봉은사지 5층석탑. 강화도에서는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봉은사지 5층석탑. 강화도에서는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 박철
따라서 강화도가 칠십년 대 중반까지도 전국 인삼 시장을 손 안에 쥐고 있었으니 강화 인삼의 집결지인 강화 수삼센터에서 전국의 인삼 가격이 정해질 정도였다. 인삼과 함께 누구나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화문석이다. 발석이라고도 하는 화문석을 언제부터 강화도에서 짜기 시작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고려 현종 때에 북송과 아라비아반도 일대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라센 제국인 대 식구에 대한수출 품목으로 금, 은, 구리, 인삼, 합죽선과 함께 화문석이 들어 있다고 전해진다. 또 송나라 서긍의 ‘고려 도경’에 화문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고, 그때의 무역항 강화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예성강 입구의 예성항이 있음을 미루어 보아 그때의 화문석이 주로 강화에서 생산되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해도 크게 틀림이 없겠다.

강화 화문석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지방에서 나는 완초 곧 왕골의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왕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왕골은 땅은 습하면서도 날씨는 맑고 따뜻해야 잘 자라는데 강화에서 나는 왕골은 다른 지방 것보다 길이가 더 길고 빛도 더 희다.

눈물의 섬,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수난을 한 몸에 지닌 뜻 깊은 고장이다. 귀족들의 족벌 싸움으로 빚어진 그 숱한 죽음들, 외세의 침략으로 빚어진 치 떨리는 분노와 원혼들, 이름 없이 죽어 간 민초들의 호곡소리가 맴도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성역이다.

어쩌면 강화도같이 그 모진 시련 속에서도 호탕한 삶의 기개를 잃지 않고 버터 온 연유에는 강화도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섬사람의 우뚝한 기질이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강화도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이북에 고향을 둔 강화 사람들은 하루빨리 남과 북의 경계선이 무너져 더 이상 강화가 눈물의 섬이 아니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는 것이다.

교동 향교.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교동 향교.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 박철

"아니 아범아 빨리 져서/ 아차차 도루루 에이야/ 행주참을 대야겠네/ 아무렴 그렇구 말구/…씨이야/ 어헤에 어서 들으라 아으하에에 허이야어/ 어서 가자/ 막걸리 먹자/ 막걸리도 좋지마는/ 어엿차 자차/ 마누라도 봐얏에/ 아에헤/ 집 떠난 지가 여러 날 되어서/ 에이야 어엿차 자차/ 처자식 생각 간절 나네/ 자네 말이 올은 말일세/ …어이야아 어으하으이차아으"-강화도, ‘시선 뱃노래’중에서
강화 교통 안내 및 정보

대중교통 정보
-서울에서 : 신촌(기점) -김포공항(송정역) -1김포 고촌 -김포터미널 -마송 -김포 대학 -강화
인천에서 : 인천시외버스터미널 -석바위 -제물포 -송림동 -검단- 양곡 -김포대학 -강화

자가운전 정보
-100번 서울외곽 순환 고속도로 이용시 : 100번 서울외곽 순환 고속도로를 이용 김포 나들목 (김포C)에서 김포/강화방면 진출하여 48번 국도 이용.
-올림픽 도로 이용시 : 88도로 끝에서 김포/강화 방면으로 가다가 좌회전 한 후에 첫 번째 분기점에서 우회전하여 제방도로를 따라가거나 3번째 분기점에서 48번 국도 이용.

식당정보
강화도는 순무김치, 밴댕이 회, 꽃게탕등이 특히 유명하다. 바닷가인 만큼 횟집이 많은데 외포리 선착장 주변이나 창후리 황복회촌에 가면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고, 강화풍물시장에서도 연중 싱싱한 회를 구입할 수 있다.
-갑곳돈대장어(강화읍 갑곳리 /032-932-2580)
-이어도횟집(내가면 황청리 /032~932-2209)
-은성횟집(내71면 외포리 /032~933~8088)
-돈대횟집(내가면 외포리 /032~933-2833)

숙박정보
강화 청소년 심신수련장(길상면 장흥리 /032-937-3300)
엘리제궁여관(송해 솔정리 /032~933-1089)
강화해수온천장(내가 외포리 /032~933-1479)
강화장여관(길상 온수리 /032~937-2901

기타 강화안내
강화군청 문화청소년과 (032~930-3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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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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