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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공주님>
ⓒ 민음사
야마다 에이미는 현재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여류 작가이다. 그녀의 글은 현재 꽤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일본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에이미의 글을 현재 세계적인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와 비교하면서, 새롭게 일본 여류 문학을 이끌어갈 주류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본을 이끈다고 평가받는 이 두 여류 문학가의 글은 너무나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이 가벼운 일상 이야기 속에 철학적 성찰과 인간적인 따뜻함을 담고 있다면, 야마다 에이미의 글을 약간은 이상하게 보이는 비일상적 이야기 속에 냉혹한 현실과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다.

둘 중에 어떤 방식의 소설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내용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이 조금은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는 그녀 나름의 개성과 매력이 있다.

이 책 <공주님>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실험적이고 개성적인 에이미만의 문체적 특성을 극명히 보여 준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을 목격한 소설 <메뉴>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없어진 것에 대해 해방감을 느낀다. 외삼촌의 가정으로 편입되어 자라는 주인공은 당돌하고 야무진 사촌 동생 세이코의 강한 구애를 받는다.

주인공은 친구로 지내던 여자가 사촌형과 결혼한다고 하자, 갑자기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돌발적 행동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혼란, 방황이다. 그들은 안정된 무언가를 찾고 싶어하지만 그 해답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주인공은 사촌 동생과 해변으로 여행을 떠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셨다. 태양 아래에 있으면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빛 아래에 있으면 날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 순간에 없는 걸 갖고 싶어한 적이 없다. 낮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원하지 않으며 밤에 푸른 하늘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만이 내 세계의 전부다."

순간적인 감정에 의존하는 현대 젊은이들의 사고를 잘 반영하는 심리 묘사가 아닌가 싶다. 또다른 단편 <체온 재기> 또한 어긋난 인간 관계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나와 그의 관계는 그가 안쪽에서 손을 뒤로 하여 문을 닫았을 때 시작해서, 내가 바깥쪽에서 역시 손을 뒤로 하여 문을 닫았을 때 끝났습니다. 사실은 그 이전에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전에 사귀었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주인공 여자는 식어버린 열정에 대하여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남자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만나면서 아직도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바보 같다는 게 아니다. 도둑맞을 건 자기 자신뿐이라니, 맨 정신으로 그런 허튼 소리를 했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사랑이 끝나 마음이 차분해지면 늘 생각하게 된다. 나는 병에 걸렸던 게 아닐까? 그런 말과 행동,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중략) 마치 여우한테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 사랑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 같이 개성적이고 솔직한 형태의 심리 묘사는 에이미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이 책의 번역자 김옥희씨는 책을 마치며 에이미 소설의 문체적 특징을 "구어체 문장의 구사"라고 평한다. 구어체를 통해 주인공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소설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사랑이라는 건 개인이 제멋대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대방의 기분은 실은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방향으로 꾸며진 것이다. 남자가 자신과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거지? 연애의 열정은 말을 앗아가기 때문에 알몸으로 끌어안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모른다."

다른 단편 <피에스타>는 에이미의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녀는 이 소설 속에서 얼굴이 못 생기고 짝사랑만 하는 한 여성의 '욕망'을 화자로 설정하였다. 그녀의 욕망은 그녀를 대신하여 이야기한다. 그 욕망은 그녀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 속에 존재한다.

"예전에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으며 되도록 자신을 감추며 살아왔다. 옛 시절을 아는 욕망들은 지금은 좋은 시절이라고 할 것이다. 욕망을 발산하기가 쉬워진 시대, 살기 편해진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욕망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을까? 참고 견디면서 나는 나 자신의 농도가 진해져 가는 걸 느끼고 있다."

소설 <공주님>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이 평범하지 않다. 주인공 남녀의 만남은 쓰레기장에서 이루어진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거지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주인공 남자는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받들어 모신다. 자칭 공주님인 여자 역시 그의 그러한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공주님과 하인처럼 위에서 부리고 아래서 복종하는 이 둘의 관계는 마지막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서로를 위하는 관계로 변모된다. 하지만 이것을 깨달은 순간 공주님인 여자는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은 그 감정이 깨어지기도 쉬운 순간인 것이다.

<샴푸>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청소년기를 맞이한 그녀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점점 재미있어졌다. 인생이란 처음부터 엉망진창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기가 쉬워진다. 사람은 엉망이 된 인생을 이야기 속에서만 즐기지만 사실은 나도 바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 속에서."

어느 누가 청소년기에 이러한 생각 한번쯤 해 보지 않았을까? 인생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는 시발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가볍고 재미있는 문체와 스토리 속에 전개한다는 점에서 에이미의 소설은 독특한 가치가 있다.

소설이 우리 삶을 반영하는 허구적 세계라는 점을 주목할 때에, 에이미의 소설은 그 허구성과 사실성의 절묘한 조화 속에 주제 의식을 전달한다. 그녀의 소설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그 냉혹함 속에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의미와 사랑,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 냉소적 미학 또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민음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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