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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노인복지관에 근무할 때, 건물 5층에 있던 '중증 치매 노인 그룹 홈'에 가보면, 신발은 어딘가에 숨겨두고 맨발로 혹은 양말만 신고 다니는 분들이 계셨다. 물론 바닥이 깨끗하고 다른 분들은 실내화를 신고 계셨기 때문에 더럽지는 않았지만, 그 분들의 발을 볼 때마다 '왜 신발을 숨겨 놓으셨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웅진닷컴, 2000)'를 읽어보면, 첫 번째 열쇠로 신발이 나온다. 저자가 "그리스인들에게 신발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신발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신발을 제대로 신고 있는가?"를 묻는 가운데, 문득 어딘가에 신발을 꼭꼭 감추어두셨을 치매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내 신발이 어디로 갔을까〉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면서 딸이 써 내려간 기록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병상 기록이나 간호 일지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치매라는 복병의 기습을 받고 무너져 가는 아버지를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진지한 책이다. 단순하고 가볍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겁고 우울해 읽기에 부담스러운 그런 책은 결코 아니다.

삼남매 중 막내딸인 브렌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살고 계신 친정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자신의 건강이나 위생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신 후, 아버지의 법적 대리인이 돼 아버지의 남은 생을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결심한 브렌다는,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남편과 둘이 돌봐드리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탁노소(託老所, 낮 동안 허약하신 어르신들을 돌봐 드리는 시설, 주간보호소라고도 함)'를 거쳐 '노인 전문 요양 시설'로 옮겨가게 되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나는 웃었고 또 울었다.

어떤 소설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까? 노화 센터에서 정신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간이 검사를 하면서 담당 의사가 "오늘이 며칠이죠?" 물으면 아버지는 "알게 뭔가" 하시면 그만이다. 그런 아버지는 딸이 아버지가 변호사를 만나러 갔을 때 아버지 몸에서 나쁜 냄새가 풍긴다면 내 마음이 불편할 거라고 하자, "너를 위해서라면 하마"하고 대답을 하시고 정말 샤워를 하셔서 놀라게 만드신다. 무언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상태에서도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계시는 것이다.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는 몹시 혼란스러워 하며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자녀가 없는 딸과 사위 역시 치매가 있는 여든 여섯의 아버지를 맡으면서 아이를 입양해 부모 역할을 시작하는 것처럼 이제 자신들은 '아버지의 부모'가 됐음을 실감하게 된다.

보통 미국 가정에서는 집 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브렌다는 건강과 위생을 위해 집 안에서는 신발을 벗고 지낸다. 아버지와의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늘 신발을 신고 살던 아버지는 집 안에서 신발을 벗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 거기다가 치매에 걸리신 분이니 오죽했을까.

급기야 브렌다 부부는 밤에 아버지가 잠자리에 드시면서 벗어놓은 신발을 감추어 놓곤 했는데, 불면증과 배회 습관이 있는 아버지는 새벽에 깨서 딸과 사위 방으로 들어와 "내 신발 어딨어?"를 묻고 또 물으신다. 시간 감각을 상실하신 아버지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날이면 날마다 "내 신발 어딨어?"를 물으셨고, 브렌다 부부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에 이른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노인 정신의학 전문의인 롤랜드 제이콥스 박사는, "이 책에서 신발은 독립성과 자주성의 상실 및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표현하는 은유물이자 초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치매 환자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환자의 신발을 숨기고, 환자는 그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의 신발을 찾아내려고 하면서 소동을 벌이고 전쟁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난 치매 어르신들도 누가 자기 신발을 숨길까봐 당신들이 미리 신발을 꼭꼭 숨겨놓으셨던 것일까….

특히 놀라운 것은 브렌다가 아버지를 돌보면서 그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 나갔다는 점이다.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살아가면서도, 아버지의 재산 처리 문제에서부터 새로 나온 약을 사용해 보는 임상 실험에 참여해 아버지가 겪으시는 변화, 그리고 요양 시설에서 아버지가 탈출하시는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역시 그 상황을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면서 자신의 꼼꼼함과 세밀함은 아버지를 닮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병이 진전되면서 '치매 가족 모임'에 참여해 고립된 개인으로 아버지의 치매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우고 어려운 문제들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의논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다. 아직까지 치매 가족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우리나라 치매 가족들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본다면 아마도 생각이 바뀔 것이다.

우리 옛말에도 있듯이 '병은 소문을 내라'고 했던가. 브렌다는 아버지의 상태는 물론 자신과 남편이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친지들은 끊임없는 지지와 격려로 브렌다를 돕는다. 그 힘은 브렌다가 아버지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시간이 흘러 이제 여든 여덟 되신 아버지를 보며, 브렌다는 비록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시지만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셔 주셔서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을 치매 환자로 '차가운 타일 바닥과 흰 벽이 있는' 시설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를 묻고 있다. 결국 그 물음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와 다르지 않다.

한 번 뿐인 인생. 그 마지막 길모퉁이에서 치매를 만나,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허물어지고 무너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점점 희미해져 가는 자기 자신을 안간힘을 다해 부둥켜안고 너무도 힘겹게 시간을 보내시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그 분들이 찾고 있는 신발은 과연 무엇일까. 그 신발은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신발을 찾아 신고 그 분들이 떠나실 곳은 그 어디일까….

(내 신발이 어디로 갔을까 Where's my shoes? / 브렌다 애버디언 지음, 이양준 옮김 / 나무생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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